분열분석, 기관없는 신체, 내용과 표현
철학자의 사상은 그 자체의 정통적인 파악이 중요하기도하겠지만 우리 같은 소박한 독서자에게는 독서를 통해서 자신이 받은 그 영향력의 강도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가타리의 '기계적 무의식'을 읽으면서 어렵고 난감한 독서를 억지로 끝내고, 예전에 세미나를 통해서 읽었던 로널드 보그의 '들뢰즈와 가타리'를 참고 삼아서 몇가지 들뢰즈와 가타리의 개념들을 다시 살펴본다.
분열분석
들뢰즈와 가타리의 자본주의와 무의식의 연구에서의 관심은 프로이트와 라깡의 무의식 연구가 병리적 인간형성과 언어적인 체계에 집중되어 있고, 그 성과가 자본주의와 파시즘에 대하여 강력한 기재로 작동하는 것에 반대해서 긍정적이고 비언어적이며, 반자본주의, 반파시즘적 작동가능성을 주장하는 것 같다.
정신분석이라는 용어와 방법을 반대한다. 분열분석 혹은 분열증 분석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프로이트가 제시했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내용을 가진 가족삼각형을 해체시키고 개인 자체를 사회의 다양한 상황과 현상적으로 대면하도록 주장한다. 콤플렉스에 억압된 주체 즉 개인이 아니라 자율적이고 자발적인 주체가 무의식의 메카니즘의 분석을 통해서 가능함을 주장한다.
'앙띠 외디푸스'와 '천의 고원'에서 핵심적으로 주장되는 분열분석이라는 개념에 대해서 가타리는 '분자혁명'이라는 책에서 설명한다. '우리는 분석가와 분열증환자의 동일시에 관해서 말한 적이 결코 없습니다. 우리는 실제로 분석가도 활동가나 작가 또는 다른 어떤 사람과 마찬가지로 분열적 과정에 다소간 참여한다고 말했지요. 그리고 우리는 항상 분열적 과정과 분열적 과정이 정확히 멈추거나 공전해 있는 정신병원의 분열증 환자를 구별해 왔습니다. 혁명가가 목적 없이 빙빙 돌고 있는 미친 사람들과 동일시해야 한다고 말한 것이 아니라, 혁명가가 분열적 과정의 양태에 따라 자신의 기획을 진전시켜야 한다고 말한 거지요. 분열증 환자는 이런 저런 이유로 사회의 질서를 위협하는 욕망의 흐름과 연결되어 있는 사람 입니다. .... 우리가 여기서 관심을 갖는 것은 그 과정의 정지가 아니라 탈영토화 과정 속에 있는 리비도 에너지 입니다. 혁명가와 마찬가지로 분석가는 외디푸스화하는 사회적 억압을 수행하는 사회 세력들에 이용당하지 말고, 탈영토화 과정을 따라가야 합니다. .... 빗장들, 자본주의의 공리계들, 초자아의 초코드화, 인위적으로 재구성된 원시적 영토들을 파괴시키는 것이 문제일 때, 분석가, 혁명가, 그리고 예술가의 작업은 다시 결집될 것입니다.' 조금 인용이 길었지만 욕망의 긍정적 사용 혹은 욕망의 긍정에 있어서 미묘하고 복잡한 장치인 무의식의 작동을 무엇인가 방향으로 노력할 수 있음을 주장한다. 그 반대의 경우가 자본주의를 지배하고 있고, 그것이 미시적 파시즘적 작동, 의미작용과 초월적 존재에 의자라는 인간 주체의 형성에도 여전히 누군가의 의도적인 설정에 따라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신화론을 주장하는 롤랑바르뜨는 구조주의로 분류되지만 그의 주된 관심사와 들뢰즈 가타리의 분열증 분석은 내용이 비슷하다. 인간은 누구나 이야기와 상징화되어 있는 신화적 구조에 지배된다. 고대의 신화적 시대도 물론 그렇지만 현대의 신화-정치, 미디어, 산업, 광고 등등-에 중독된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신화적 구조요 요소를 분석하여 왜곡된 신화를 비판적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 구조 혹은 작동의 방식을 이해하려는 것은 분석과 비판을 통해서 현상 혹은 본질을 파악해서 무엇인가의 방향을 주장하는 것이다. 물론 구조를 파악하는 방식(구조주의)과 작동을 파악하는 것(후기구조주의)은 실천적인 측면에서 다를 것이다.
분자적 무의식, 기계적 무의식
작동하는 것에 대한 관심은 들뢰즈가타리의 기계개념에서 중요하게 드러난다. 구조와 의미의 정적이고 초월적인 분석 내용은 기계와 연결이라는 리좀적인 분석 내용으로 대체된다.
구조적인 파악은 유기체 혹은 조직체를 기관orgen의 구성으로 본다. 기관은 각각의 폐쇄적인 역할을 통해서 기능하고, 체계적인 작동에 의해서 전체 시스템이 이루어진다. 위계적이고 수직적인 분류와 계통에 의해서 이해되는 방식이 중요하다. 무의식을 발견한 구조주의나 소쉬르의 언어 기호학적인 의미론이 이러한 수목적인 혹은 계통수적인 사고에 속한다.
그러나 기계라는 역동적인 개념은 조직체와 사회체를 구조와 기관의 구성이라는 정적인 개념에서 역동적인 연결 개념으로 이행 시킨다. 기계개념은 의미적이지 않다는 것과 무엇과 연결되어 작동한다는 것이 중요하다. 기계는 그 자체가 하나의 요소적인 구성물이고, 다른 부분과 연결되는 것에 의해서 작동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연결은 곧 종합되는 것이고 그 종합은 공간적 근접성인 연접과 시간적 교대적인 연결, 즉 이접, 그리고 시공적인 회복과 회귀의 통접의 세가지 연결이 있다. 이 세가지의 종합 개념을 언어적인 도움을 받아서 설명하면 연접은 접속사 '그리고and', 이접은 접속사 '또는or', 통접은 접속사 '그럼에도불구하고nevertheness'로 설명된다. 이 기계 개념은 사건 혹은 상황을 이해하는 다른 태도를 위해서도 필요하지만 들뢰즈와 가타리는 언어적으로 파악하는 무의식에 반대해서 기계개념의 무의식의 작동관계를 설명하기 위해서 설정된다.
사회적으로 형성된 것은 개인적인 무의식에 어떤 영향을 주게 된다. 그렇지만 들뢰즈와 가타리는 프로이트의 이론에서처럼 아버지를 중심으로 한 가족삼각형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개인과 사회의 관계는 가족을 꼭 거치는 것이 아니라 직접적으로 대응된다. 무의식의 기초인자는 욕망인데 이것에 영향을 주는 것을 투여라고 하고 이 투여는 편집증적인 방향과 분열증적인 방향을 띠고, 편집증적인 방향은 분리차별적이며, 중앙집권적인 권위를 투여하고 분열적인 방향은 탈주선을 따른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관심은 욕망의 분열적 방향, 탈주선적인 움직임, 횡단성 개념에 주목한다.
사회 현상이나 물리 화학적 현상은 몰적 현상(몰적 기계)과 분자적 현상(분자적 기계)으로 설명할 수 있고, 무의식은 분자적 기계의 작동을 하는데 그것을 분자적인 욕망 기계라고 할 수 있다. 이 분자적인 욕망기계는 특정한 종합방식- 연접, 이접, 통접 -속에서 작동한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욕망 개념은 정신분석학자들의 결핍과 필요로 해석하는 것을 반대한다. 욕망의 이러한 개념화(플라톤, 프로이트, 라깡)를 '관념론적, 변증법적, 허무주의적 개념화'라고 비난하고 욕망은 획득이나 결핍이아니라 생산 혹은 욕망적 생산이다. 욕구는 자유롭게 떠다니는 에너지 프로이트가 리비도라 불렀고 니체가 권력에의 의지라고 부른 바로 그 에너지이다. 무의식은 그 욕망이 작동하는 욕망기계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앞서 언급했듯이 정신병자들은 종종 자신들의 신체를 다양한 부분으로 분리된 종재로, 때로는 침범하고 억압하는 기계들로 경험한다. 또한 정신 병자들은 육체가 기관 없이 존재하는 것 같다는 느낌으로써 긴장병적인 상태로 들어간다. 그리고 몇몇의 정신분열자들은 이동하는, 복수적인 인격을 가지며, 다양한 역사적 인물과의 동일화를 가정한다. 이러한 저인적인 경험들이 욕구적 생산의 기본적인 구성요소의 기초를 형성한다. 1)욕구하는 기계들, 2)기관없는 신체, 그리고 3)유목적 주체가 그 세 요소이다. 욕망하는 기계들은 연결적 종합에, 기관없는 신체들은 이접적(선언적) 종합에, 그리고 유목적인 주체들은 통접적(연언적) 종합에 대응한다.
기관없는 신체
욕구적 생산과정에서 욕구하는 기계들이 응결되어 하나의 거대한 미분화된 대상을 형성하는 단계가 도래한다. 욕구하는 기계들은 파괴됨으로써 기능하는데 이 단계, 이 대상이 기관없는 신체이다. 부분적 대상들(즉 욕구하는 기계들)과 기관없는 신체는 근본적으로는 동일한 존재이며, 동일한 복수성이다. 기관없는 신체는 스피노자의 내재적 실체와 유사하며 욕구하는 기계는 그 실체의 굴극적인 속성과 유사하다. 전체(신체)는 오직 조직화된 몰적인, 집합적인 수준에 존재할 뿐이지만 욕구하는 기계들과 기관없는 신체는 분자적인 수준에서 기능한다. 구분되며 공존하는 두 존재는 욕구하는 기계들을 밀어내는 편집증적인 기계를 생산하거나 욕구하는 기계들을 잡아당겨 (분열증적인 과정을 통해서) 기적을 만드는 기계를 만들어 낸다. 이것이 (관찰되는 현상으로) 설명되는 것이 보다 큰 기관없는 사회적 신체에서이다. 들뢰즈는 재영토화된 형태하에서의 이사회적 신체를 socius소키우스라고 부른다. 모든 사회는 소키우스를 생산한다. 소키우스의 세가지 근본적인 유형은 대지의 신체(원시사회), 군주의 신체(야만사회), 자본의 신체(자본주의사회)이다. 그렇지만 들뢰즈와 가타리가 소키우스를 기관없는 신체로, 예컨데 자본을 '자본가의 기관없는 신체'로 규정하고 있다는 해도 결국 그들은 소키우스와 기관없는 신체를 구분한다. ”기관 없는 신체는 소키우스의 극한, 그의 탕영토화의 탄젠트, 재영토화된 소키우스의 궁극적인 잔여물이다." 소키우스와 기관없는 신체의 차이는 이접적(선언적) 종합의 상이한 사용에 있다. 소키우스가 배재적 종합을 사용한다면, 기관없는 신체는 내포적 종합을 사용한다.
를뢰즈와 가타리는 욕구하는기계들과 기관없는 신체사이의 발산으로서 '기적을 만드는' 기계 관계(단계)를 시각적, 도상적 이미지로 설명한다.
'욕구하는 기계들이 '기적을 만들' 때, 그들은 "스스로 그 만큼의 분절점들로서 기관없는 신체에 부착시킨다. 이 분절점들 사이에서 새로운 종합의 전체 그물망이 직조되며, 표면을 마치 격자처럼 좌표들로 만든다." 짝지어진 욕구하는 기계들의 각 이원적인 연쇄는 기관없는 신체의 면을 가로지르는 하나의 선이며, 그러한 선들의 복수성이 그 표면을 가로지름으로써 하나의 격자를 형성한다. 그리고 격자가 그 면내에 욕구하는 기계들의 분배를 기입하거나 기록한다. 하나의 욕구하는 기계는 여러 상이한 이원적 연쇄내에서 기능할 수있다.(먹는 기계, 숨쉬는 기계, 말하는 기계, 키스하는 기계 등으로 기능하는 입기계). 그러나 그러한 기능을 동시에 수행할 수는 없는 것이다.(이접적 종합) 격자위에 여러 다양한 선의 교차점에 위치하는 그러한 욕구하는 기계는 어떤 경우는 이 기계와 다른 경우는 저 기계와 짝 지워짐으로써 하나의 접속점을 이루게 된다. 그렇게 기관없는 신체는 선언적(이접적) 종합을 형성하며, 그 결과 격자위의 모든 선분, 즉 욕구하는 기계들의 모든 연쇄는 단번에 리비도적으로 투여(투자)된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이접적 종합의 개념은 이접의 '긍정적이고, 무제약적이고, 내포적인' 형태, "이접적으로 머무르는, 그러나 하나가 다른 하나를 배제하지 않으면서, 갈라진 항들을 항상 긍정하는 그러한 이접이다." 이는 결국 스스로 분화하는 그리고 그의 차이를 긍정하는 그러한 차이이다.
<노마드적 주체>
사회적 코드들은 이 이접적인 종합의 배제적인, 제약적인, 부정적인 사용을 부과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욕구적 생산을 규정된 경로에 따라 흐르게 한다. 그러나 이 코드들이 와해될 경우 또는 탈영토화할 경우, 기관없는 신체의 내포적인 투자가 가능하게 되며, 욕구적 생산의 세번째 요소인 노마드적 주체가 생산된다. 노마드적 주체는 기관없는 신체의 격자를 가로지르는 순수한 강도의 한 점, 욕구하는 기계로부터 욕구하는 기계로 이동하면서 혼합적인 동일성들로 움직이는 장소이다. 노마드적인 주체는 타자가 되는 식물, 동물, 광물이되는, 민족, 문화 그리고 그들의 신들이 되는 과정을 밟는다.
기계적 배치와 추상적 기계들
무의식을 포함한 모든 상황의 전개의 중심적인 문제는 근본적으로 배치이다. (그런데 1)배치와 2)선택(의지적 혹은 욕망적)과 3)경쟁(다른 배치와의)에서의 승패는 어떤 관계일까.) 배치는 기계적 작동의 근본 방식이다. 누군가 초월적으로 역할과 의미와 방향을 부여하는 것이거나 부여되는 것이 아니라 역할과 의미와 선택적인 방향이 그 배치에 의해서 열려져 있는데, 그 배치는 기초적 구성요소와 이행구성요소가 중요하다.
가타리에 의하면 무의식의 기계적 구성요소는 도상적 구성요소, 지표적 구성요소, 코드화 구성요소의 단계로 진행한다. 도상적 구성요소는 하나의 감각적(시각적, 청각적, 미각적 등등) 형태의 일관성 있는 배치를 말한다. 지표적 구성요소는 일관성이 증대하고, 잠재적 가능성이 현실적 가능성으로 이행한 것이다. 즉 도상적 요소들간에 관계가 생기고 그것이 현실적인 관계가 된 것이다. 지시관계가 생기고, 메세지의 발신이 생성된다. 코드화 구성요소는 메세지의 수신자가 특정화되어 있다. 한번의 코드화는 다음 번에 반복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능력(본래적이지 않지만 부수적으로 생겨난, 잉여적인)과 비슷한 도상적 내용이 지표적 구성요소로 전환되는 유사과정이 이행된다. 이것을 기계적 잉여성이라 부른다. 코드화 구성요소는 기계적 잉여성의 상호작용으로 계열전체로 확대되고 기호적 잉여성의 전체집합을 형성한다. 이것이 기호화 구성요소들인데 이들의 부분집합이 이행구소이다. 이행구성요소는 탈영토화(와 재영토화), 그리고 내용-표현이라는 양극분화의 체계를 갖고 있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기계적 배치를 위해서 사용하는 '내용'과 '표현' 옐름슬레우에서 유래한다. 예름슬레우는 소쉬르의 '기표'와 '기의'를 '표현'과 '내용'으로 대체하고자 하고, 이 개념들을 다시 무형적인 재료인 물질, 이 물질이 모양을 띰으로서 개별화된 요소들의 형식, 그리고 형식에 의해서 그렇게 모양을 부여받은 물질 또는 요소들의 실체를 구분한다.(들뢰즈와 가타리/로널드 보그 p204) 그들은 내용과 표현 관계를 세가지 모델로 구성한다. 이들은 실재의 물리-화학적 지층, 유기적 지층, 인류적 지층에 대응한다.
물리화학적 지층에서는 분자적이고 몰적인 조직화를 통해서 파악되는데 예를 들면 결정체들은 미시적 구조(내용)의 거시적 표현이다. 물리화학적 지층에서는 내용과 표현은 정신적인 구성물이 아니라는 점에서 실질적이고, 그 구분의 분자적인 것과 몰적인 것이 하나의 단일한 사물의 부분이라는 점에서 또한 형식적이다. 대조적으로 유기적 지층에서는 내용과 표현은 서로에 대해 독립적이다. 표현의 단위는 DNA 뉴클레오티드들의 선형적 계열이고, 내용의 단위는 DNA계열에 대응하는 아미노산들의 선형적 계열이다.이 지층내에서는 분자적과 몰적의 구분은 결정적이지 않다. 이 수준에서 표현은 분자적인 동시에 몰적이기 때문이다.
인류적 지층에 이르러 표현과 내용은 하나의 새로운 형태를 띤다. 내용의 형식은 '동질 조형적homoplastic'이기를 그치고 '이질조형적alloplastic'으로 된다. 그것은 외브 세계에 수정을 야기시킨다. 표현의 형식은 생성적이기를 그치고 언어적인 것이 된다.. 즉 그것은 외부로부터 이해 가능하고, 이전 가능하고, 수정 가능한 상징들을 통해서 작동한다.
내용과 표현
내용과 표현이라는 기계적 배치는 들뢰즈가 그의 저서 '비작가:새로운 지도작성자'라는 글에서 제시한 모델에서 잘 제시된다고 한다.
서구에서 비행이라는 범주가 형성되고 그것이 감옥의 팽창과 동시에 이루어졌다.
비행(非行)이라는 범주는 생활습관이나 태도가 범죄성을 형성한다고 가정함으로써, 그것들을 형벌과 교정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도록 한다. 학교처럼 감옥 이외의 공간에서조차 게으름이나 나태함이 정당하게 규제될 수 있는 것은, 그것들이 범죄성과 연결된다고 여기게 하는 ‘비행자’라는 범주 덕분이다. 푸코는 사람들이 당연히 존재한다고 가정하는 ‘이성’, ‘비행’, ‘성’과 같은 보편적 범주들을 의심한다. 그리고 어떤 역사적 실천과 관계가 그것을 만들어내었는지 탐구한다. ‘광인의 감금’(이성 형성)이나 ‘범법자의 구금’(비행 형성) 혹은 ‘성적 실천의 고백’(성 형성)이라는 실천의 발견은 그 탐구의 결과였다. 그리고 푸코는 이렇게 형성된 범주들이 결코 중립적이지 않음을, 특정한 권력 현상의 핵심적 축임을 밝혀낸다. 예를 들어 푸코에게 이성이라는 범주는 사회가 그 성원들이 특정한 형태의 사고방식을 가지도록 통제하는 수단이 된다. 여기서 벗어나는 자는 이성의 능력이 없는 ‘환자’라는 이름으로 정당하게 감금된다.
이러한 푸코의 감시와 처벌에서의 감옥을 다루는 예에서 들뢰즈는 표현과 내용을 설명한다. 비행개념과 감옥의 이중의 역사는 표현과 내용의 기호적 체계의 단편과 사회적, 기술적 기계 내의 한 요소의 역사이다. 19세기 현대성의 시작은 권력 개념과 작동의 새로운 모델로 시작한다. 푸코는 이렇게 형성된 범주들이 결코 중립적이지 않음을, 특정한 권력 현상의 핵심적 축임을 밝혀낸다. 예를 들어 푸코에게 이성이라는 범주는 사회가 그 성원들이 특정한 형태의 사고방식을 가지도록 통제하는 수단이 된다. 여기서 벗어나는 자는 이성의 능력이 없는 ‘환자’라는 이름으로 정당하게 감금된다. 비행이라는 범주는 생활습관이나 태도가 범죄성을 형성한다고 가정함으로써, 그것들을 형벌과 교정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도록 한다. 학교처럼 감옥 이외의 공간에서조차 게으름이나 나태함이 정당하게 규제될 수 있는 것은, 그것들이 범죄성과 연결된다고 여기게 하는 ‘비행자’라는 범주 덕분이다.
구분되어야 하는 분류 즉 정상인이 아닌 광인, 환자, 피교육자, 비행(비행자)는 표현-형식이다. 정상인을 구분해내는 반대로 비정상인을 구분해내는 근대의 동질성의 표현-형식이다. 그리고 그 표현과 대응하는 근대라는 사회에서의 내용-형식은 정신병원, 병원, 학교, 감옥이 된다. 근대성은 동질적으로 연대된 정상에 대해 구분해내는 비행의 개념을 등장시키고 즉 표현하게 되고, 구분과 격리 즉 감옥을 내용으로 갖게 된다. 감시의 원인으로서 근대적 정신성의 표현인 정상과 구분되는 비행 개념과 감시의 내용으로서 감옥과 공통의 내재적 연결 고리를 갖는다. 그 연결고리는 내재적 관찰과 감시라는 것으로 1791년 철학자 밴담이 제안 했던 감옥의 가장 효율적인 평면 형식인 파넵티콘이다. 들뢰즈에 따르면 파넵티콘은 하나의 추상 기계이며, "그것을 구현하고 있는 감각적인 형태와 범주적인 형상들에 독립해 있는 하나의 순수한 기능으로서, 그리고 이 물질적이 형상화된 실체들(비행자(수용시설)실체, 병원 실체, 학교 실체, 노동자(수용시설) 실체, 군인(군대) 실체 등)에 대해 독립적인 하나의 순수한 질료로 정의 된다.
감옥은 감시라는 권력의 실천적인 기능을 위한 파넵티콘이라는 질료의 공간 구성적인 내용이다.
이 추상기계는 하나의 관념이나 모델이 아니라 권력의 한 '디아그램', 하나의 내재적이고 일반화된 기능이다. "그 사회적 장과 동외연적인 디아그램은 언제나 공통적인, 통일화하지 않는, 내재적인 원인의 역할을 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푸코의 '감시와 처벌'을 분석하면서, 비행의 담론을 통해서 물체를 변환시키는 판단들(발화에 의한 명령적 표현에 의한 비물체적 변환들), 평결들, 평가들, 분류들을 '표현'으로 동일화 한다. 그리고 감옥-기계, 기능의 특수한 집합, 이질적인 존재들을 내용으로서 동일화 한다.
카프카의 독해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그들의 기호적 체계들, 즉 각각의 비 물체적 변환들, 행위들, 사형 선고들, 평결들, 법들은 표현의 그룹이고, 각자의 '성-기계', '법적-기계'와 같은 기계들을 가지고 있는 다양한 기계적 체계들을 내용으로 다룬다.
2011. 10. 3 이 관 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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