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뢰즈는 나에게 독서와 사유의 여행을 계속하게 한다. 들뢰즈를 통하여 스피노자를 알았고, 니체를 접했다. 스피노자는 철학이 현학이 아니라 습관이며 행동강령임을 나에게 가르쳐준다. 곰곰히 생각하기 그리고 생각한 것을 실행하기. 들뢰즈의 니체는 나에게 긍정주의를 가르쳐주었다. 니힐리즘으로 명명되던 니체는 들뢰즈를 통해서 나에게 삶에 대한 찬란한 예찬으로 찾아왔다. 있는 그대로 것, 혹은 의지와 결단의 것 모두를 긍정하는 존재하는 그 자체에 대한 받아들임이라는 전면적인 긍정주의. 세상의 모든 것에 대해 타인에게로 문제를 던지는 원한의 태도를 버리는 것, 또 다시 자신에게 그 문제의 책임을 묻는 자책을 버리는 것, 진전으로 삶에 대한 과신에 빠져 금욕적 이상으로 자신을 몰아세우는 결백을 버리는 것. 그리고 진정으로 있는 것으로, 다시 돌아오는 순환의 영겁회귀로 돌아오는 자신, 혹은 존재를 긍정하는 태도의 삶. 그것이 던지는 주사위의 욕망과 떨어진 주사위의 운명을 긍정하는 진정한 긍정적 허무주의, 허무주의 긍정의 삶을 가르쳐준다.
조금은 거창하게 시작했지만 십 년 동안의 들뢰즈 읽기를 통해서 나름대로 느낌과 축적이 있는 듯하다.
어제 ‘들뢰즈와 음악, 회화 그리고 일반예술’이라는 ‘로널드 보그’저, ‘사공일’역의 책을 마쳤다. 책의 내용의 소화된 수준과 상관없이 책을 마쳤다는 느낌은 등산에 오른 산행인 같다고 할까 어떤 만족감이 가슴에 차오른다.
이책은 내가 읽은 로널드 보그의 들뢰즈에 관한 저서로서 두번째의 책인 것 같다. 맨 처음 들뢰즈들 접할 때 로널드 보그의 ‘들뢰즈와 가타리’라는 지독히 어려운 입문서에 데어 버렸던 기억이 생생하다. 세미나 팀에 처음 합류하여 읽어도 읽어도 모를 책을 요약하느라 며칠을 밤을 새웠다.
십여년이 지난 지금, 그들의 번역서가 이제는 그토록 두렵지는 않다. 물론 아직도 난해하기는 마찬가지 이다.
로널드 보그는 ‘천의 고원’, ‘감각의 논리’. ‘철학이란 무엇인가’를 집중적으로 참고 한다.
제 1 부 음악
보그는 ‘주기적인 반복은 환경을 코드화한다’라고 주장한다. 단순한 주기적 반복은 박자 measure 혹은 meter이다. 그러한 박자는 리듬의 반복과 구별된다. 반복은 차이를 생산한다. 음악이 서로 얽히게 되는 우주는 한정된 전체성이 아니라 열린 전체성이다. 음악과 세계가 유희하는 박동pulsation은 동일한 것의 척도회된 되풀이가 아니라, 통약 불가능한 것과 부동한 것의 비박자적 리듬이다. 음악에 표현된 시간은 크로노스chronos라기 보다 아이온aion의 시간, 말하자면 특개성haecceity과 되기의 유동적인 시간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리토르렐로를 탈영토화하는 것으로 구성된 활동적이고 창조적인 작용”으로서 음악을 기술한다.
리토르렐로는 ‘반복구’라는 뜻이다. 새의 노래는 일종의 자연의 리토르렐로이다. 새는 울음소리를 탈영토화하여 표현형식과 내용의 형식을 만들어내면서 음악, 자연의 음악이 된다.
리토르렐로는 <안정화의 점>으로서 직접적인 구성요소들과 하부-배치intra-assemlage를, <환경의 순환>으로서 차원적인 구성요소들을 가지는 내부-배치intra-assemblage를, 그리고 <외부로의 열림>으로서 이행 혹은 탈주의 구성 요소들을 가지는 상호-배치inter-assemblage를 창조한다.
그렇지만 예술은 소유이고 점유로서 영토적이다. 영토설정에서 중요한 것은 특질들과 리듬의 자율성이다. 용토가 형성되기를 의도한다면 일정한 단계의 탈토드화와 탈영토화가 발생해야한다.
내적 관계들은 영토적 모티브를 구성하고, 외적 관계들은 영토적 대위법을 형성한다.
영토화는 두가지 중요한 결과인 “기능들의 재조직화”와 “힘들의 재그룹화”를 유도한다.
영토성은 탈코드화와 재코드화(탈영토화와 재영토화)의 복합적인 과정이고, 그것은 기능들의 재조직화와 힘들의 재결집을 유도하는 표현적인 특질들과 자율적인 리듬들(영토적인 모티브와 영토적인 대위 선율 양족 모두)를 창조함으로써 환경들과 리듬들을 변형시킨다.
들뢰즈의 음악에 대한 논의는 리토르렐로의 영토성, 리듬적 반복과 병행해서 탈영토화의 핵심적 개념인 –되기(becoming)의 문제를 제안한다. 음악은 되기의 형식이다. 그리고 그것은 되기의 세가지 특정한 형식, 즉 “여성-되기, 아이-되기, 동물-되기”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
사회적 코드화는 여성보다는 남성, 아이보다 어른, 동물적인 것보다는 이성적인 것, 유색인 보다는 백색 등에 내재된 특권을 부여하는 서양 사회의 비대칭적 이항 대립 방식으로 작용한다. 되기는 이러한 코드들을 탈영토화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남성-되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남성은 전형적인 몰적 실재물이고 반면에 되기는 분자적이기 때뮨이다. 그러므로 되기는 여성, 아이, 동물의 모방(단지 사회적 코드만을 강화하는 행동)을 수반하지 않고, 고정된 동일성들의 형태 변환 지대에서 여성, 아이, 동물과 함께 발생하는 코드들의 명시 불가능하고 예측 불가능한 붕괴를 포함한다.
되기는 아이온의 시간, 즉 격동적이고 미분되지 않는 시간 유동에 참여한다. 반면에 역사는 크로노스의 세계, 즉 척도와 연속의 시간에 속한다.
들뢰즈는 음악에 있어서 고전주의와 낭만주의를 구분한다. 고전주의가 환경과의 관계들, 그리고 카오스에서의 질서 창조와 관련이 있다면 낭만주의는 대지에, 영토의 정초에 집중한다. 낭만주의 음악은 환기적인 픙경과 배경과의 연상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에서 영토적이다. 낭만주의의 외침은 창조가 아니라 신성화된 대지 위에 영토의 경계들을 추적하여 도시를 발견했던 의미에서 정초이, 다. 영토적 리토르렐로는 대지 힘들의 정초를 발견할 수 있고, 그것은 “두가지 모티브, 즉 새의 배치들을 환기시키는 선율적 모티브와 영원히 심오한 대지의 호흡인 리듬적 모티브를 결합시킨다.
영토적 리토르렐로는 탈코드화되는, 그리고 그것에 의해 표현될 수 있는 환경 구성 요소들로 구성된다. 낭만주의에서 질료는 “내용의 질료가 되는 것”을 멈추고 “표현의 질료가 된다” 그리고 그 표현 질료는 또한 “연속적 변주에서 움직이는 질료”이다.
대조적으로 근대 작곡가들은 형식, 질료, 힘을 다루는 제3의 방식을 발견하는데, 질료를 우주적 힘을 포착할 수 있는 분자적 소재로 변환시킨다. 힘들을 포착할 수 있는 분자화된 음향질료로서의 음악의 근대적 개념은 아마도 에드가 바레즈에 의해서 분명히 표현된다.
근대 예술가들이 연속적으로 변주하는 낭만주의적 소재 보다는 오히려 힘들을 포착할 수 있는 분자화된 소재를 형상화한다면, 그들은 대지와 민중에 대해 19세기 음악가들이 가졌던 것과는 다른 관계를 가진다. 대지는 더욱 탈영토화되고, 민중은 한층 더 분자화한다, <영토의 불안정>에서 폴 비릴리오의 분석을 지지하는 들뢰즈와 가타리는 모더니티에서 통제의 권력자들이 수반하는 지구화와 정치적 규제 방법들의 분자화를 인지한다. 근대 예술가들의 노력은 분활 가능한 다양성으로서 민중을 창조하는 것이 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모던의 배치가 우주적인 것이라고 한다. 우주적이라는 것은 영토없는 세계, 절대적으로 탈영토화된 세계이고, 배치는 고전주의처럼 카오스의 힘과 대변하지 않고, 낭만주의처럼 대지의 힘 내지 민중의 힘 안에서 깊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우주적 힘 안에서 개방한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식별하는 고전주의, 낭만주의, 모던의 세 시대는 리토르렐로의 세가지 모멘트(유기적인 점, 영토적 순환, 그리고 우주적 벡터)와 상응한다. 그러나 리토르렐로는 시대적 과정으로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단일하고 동일한 것의 세가지 측면으로 기능한다.
질료들을 분자화하고, 힘들을 포착하는 모던의 임무는 모든 예술의 책무이다. 모더니즘에서 힘들은 직접적으로 이용되는 반면, 고전주의와 낭만주의에서의 힘들은 질료와 형식의 관계 속에서 나타나게 된다.
리토르렐로의 해석에 있어서 영토성의 문제를 핵심적으로 다룬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수집한 유기체, 생명체 들의 많은 예가 있다. 진드기의 환경은 요소들의 닫힌 계이고, 그것의 외부에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동물 들이 가은 우주에 거주하는 것 같지만 각각 다르고, 주관적으로 한정된 환경에서 살아간다. 지각에서 행동으로의 이행은 전선을 통한 전류의 유도가 아닌 “선율 펼침 속에서 하나의 소리로부터 다른 소리로 이행하는 유도”로서, 즉 의미를 표현하는 통합적인 주체로서 이해되는 것이다. 지각과 행동을 통합시키는 선율성장 혹은 성정원칙에서 분리될 수 없다. (심지어) 낭배 형성 조차도 “모든 고등 동물의 생명이 시작하는 순수 선율로서 언급할 수 있다. 유사하게 수영하기위해 문어는 근주머니를 수축하고, 문어의 근주머니 형성은 물의 비압축성과 함께하는 대위법 속에서 발생 선율이 되며, 물의 비압축성은 이러한 수압운동을 가능하게 한다. 박쥐와 야행성 나비의 관계처럼 종들간의 대위법 관계는 더 복잡하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철학자 레이몽 루이예의 형태 창조와 영토성 개념의 관계에 집중한다.
화이트헤드를 따르는 루이예는 생명향태들과 집합체들을 구별한다. 그러나 루이예는 정신-신체의 이원론 혹은 엔텔레케이아 를 주장하지는 않는다. 루이예의 논지는 인간의식이 모든 생명체로 푯;되는 일반적인 형성활동의 매우 특수화된 색다른 실례라는 것이다. “유기체는 위험과 위난 상태에서 그 자체를 형성한다. 그것은 형성되지 않는다. …. 생명체는 동시에 작인(어떤 것의 원인)이고, 그 자체 행동의 ‘소재’이다. … 처음에 주제는 관념-이미지와 재현화된 모델이 될 필요가 없고, 생명체가 주제에 따라 직접적으로 그 자체를 형성한다.”
루이예에 따르면 “형태형성은 시간적이고 ‘수평적인’ 연속에서 진행되지만, 언제나 ‘수직적’이고 횡단-공간적이며 횡단-시간적인 주제, 말하자면 전체로서 반복될 수 있거나 혹은 변주 속에 분포될 수 있는 개체화된 선율적 주제에 다라서 나아간다.
현재화하는 형태형성의 과정 속에 내재한 잠재적인 모티브인 수직적인 선율의 주제는 의식이다. 그리고 의식은 “절대적인 실존 속에서 다름아닌 바로 형태이다. 정확히 말하면 활동적인 형성과정이다.
인간 의식의 파생적이고 특수화된 자연을 강조하기 위하여 루이예는 (자연의 형태화를) 다른 세 종류의 형태로 분류한다. 형태I은 모든 생명체에 공통적인 자체-존속하는, 자체-행동하는, 자체-향유하는 기본적인 형태이다. 형태II는 형태I의 특정한 경우이고, 지각과 자동 운동 도식화auto schematition의 기관 발생을 통하여 창조된 반영적이고 재현적인 의식의 경우이다. 형태III은 형태II의 부분집합이며 인간에게서만 발견되는 형태인데, 그것은 “실리적인 지각이 그것의 역할을 변화시킬 때, 그리고 신호가 상징이되고 그 자체 조작가능하게 되며 생명 유지에 필요한 유용성 혹은 즉각적 유용성의 모든 정황으로부터 분리가능하게 될 때 나타난다.” 이런 일련의 형태들 속에서 루이예는 곤간과 시간의 정복으로서, 그리고 “정복과 또한 창조”로서 형태 형성의 본성을 명확하게 인지한다.
원자와 분자에서 예증된 것처럼 형태I은 “공간의 영역을 구축하기 위해” 구조화하는 활동이다.
형태II 생명체들은 지각과 도식화의 눙력이 주어진다면, 움벨트(환경)로 확장된 공간을 점유한다. 그리고 형태III의 출현과 함께 “주체 혹은 지각하는 의식은 일종의 관점으로서 확장과 지속에서 분리된 듯하다.
영토성은 공간과 시간의 정복 속에서 특정한 무대를 표지하고, 형태I 과 형태II 간의 친밀한 접속을 표현하는 것이다. 영토성은 형태II의식의 발생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정주된 영토는 영토에 정주하는 신체에 의해(즉 형태 형성의 형태I 과정의 현재화하는 신체에 의해) 규정되고 형성된다.
유기체 운동은 환경을 포함한다. 영토로서 독특한 외부-유기체의 형태로 분화되기 이전에, 움밸트(환경)는 유기적 형태에 종속된 주제이다.
유기적 창조성의 하위 범주로서 인간예술을 다루어야 한다. 인간에게서 장식적 주제는 처음으로 뇌조직에서 관념으로 나타나고, 뇌-손-눈 활동의 복합적인 신경운동의 순환을 통해 실행된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문신한 인간은 본질적으로 장식적인 표현을 형성하는 공작새와 다르지 않다.
생물학적 의미에서 영토는 탈영토화와 재영토화의 일반적인 과정을 통해 창조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환경과 영토를 구분한다. 리토르렐로는 환경을 위한 유기화의 점으로 역할을 하고, 영토의 차원적인 공간의 경계를 정할 수 있으며, 그것은 영토에서 우주로 탈주선을 펼친다. 그러나 리토르렐로의 세가지 발현은 “진화의 세가지 연속적인 모멘트가 아니라, 단일하고 동일한 것의 세가지 측면이다.”
들뢰즈는 생물학에서의 연구를 형태 창조의 문제와 연결한다. 생명체들과 환경들은 상호적으로 특수화되거나 혹은 함께 결정되고, 유전자 코드들은 물질적 콘텍스트들과 분리될 수 없다. 생물학자 마투라나는 “생명체계들은 인식체계이고, 하나의 과정으로서 생명은 인식의 과정이다.”라고 주장한다. 수정된 알에서 발생에 필요한 세가지 구성요소는 핵DNA, 세포질 거대분자(mRNA), 세포골격의 메트릭스(세포구조)이다. 세포질은 DNA 지시를 수용하기 위한 수동적 매체가 아니고, 세포구조는 DNA 활동을 위한 중립적인 콘텍스트가 아니다. 세가지 모두 발생에 능동적인 참여물들이다. 유전된 특징과 습득된 특징들 사이의 이해 가능한 구분이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유기체들과 환경들은 세계의 탄생 과정과 관계된 “상호적으로 펼쳐지고 접혀진 구조”이다. 그 세계는 적자 생존의 논리에 지배되지 않는다.
진화과정은 “최적화(적자생존)라기보다는 오히려 만족화이다(만족스런 차선의 해결책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것은 브리콜라주를 통해, 다시말해 복잡한 배열들 속에 부분들과 항목들을 구성하는 것을 통해 진행된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어떤 이상적인 디자인을 충족시키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들은 단지 가능하기 때문이다.
만족화의 브리콜라주(부분들의 조합, 단지 그것들이 가능하기 때문에)로서의 자연 부동 개념에서 창조가 진화의 근원적이고 활동적인 힘이다.
생존과 번식의 광범위한 강제는 무수한 구조적인 결합들을 허용하지만 아무것도 명령하지 않는다. 생명 체계들은 본질적으로 창조적, 창의적이고, 형성과정들이기 때문에 늘 새로운 결합들이 발생한다.
환경에서 영토까지와 공간적 유기화의 다른 형태들까지의 이행 속에 나타나게 되는 탈영토화와 재영토화의 다양한 정도는 결코 목적론적 디자인의 증거가 아니라 단지 편재적이고 실험적인 브리콜라주의 생산물들, 즉 넓은 영역의 구조적인 가능성들을 횡단하며 기계적 배치들을 창의적으로 구성하는 생산물들이다.
유전자 결정론은 유기체들을 선재하는 프로그램으로 구성된 로봇으로 축소시키고, 행동주의 결정론은 유기체들을 자극-반응 장치로 간주한다. 이러한 사고의 매커니즘에 반대하기 위해서 폰 윅스퀼은 생물학적 주체와 의미를 진술하고, 루이예는 생명형태를 의식과 동일시하고, 마투라나와 바렐라는 생명 체계들은 인식체계로서 규정한다.
천의 고원에서 들뢰즈와 가타리는 전술한 데키르트의 이원론을 대항하기 위해서 욕망하는 기계, 기계적 배치, 기계 문(門) 등과 같은 반유심론적 어휘를 사용한다. 그리고 폰 윅스퀼과 루이예는 정신 혹은 기계용어가 아닌 선율, 대위법, 화성, 리토르렐로 같은 음악용어로 자연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주체, 의식, 인식에 대한 어떠한 준거를 피함으로서 그들은 우주의 리토르렐로가 그 자체를 생산하고, 자체의 고유한 설명임을 강조한다. 리토르렐로는 환경에서 구성되는 미분적 리듬이고, 환경 구성 요소들간의 관계이다.
아마 예술 특히 우선 음악은 그러한 자연 자체이며 그 자체의 우주적 창조로서 리토르렐로이다.
인간음악은 리토르렐로의 탈영토화(고전주의 시대의 카오스에서부터 얻어진 형성된 실체, 낭만주의의 연속적인 변이에서 이동하는 질료를 구체화하는 연속적인 전개의 형식, 근대에서 비음적인 힘들을 포획할 수 있는 분자 물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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