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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

니체와 철학 02

책을 시작한지 꽤 오래 되었다.  책이 어려워서 진도가 제대로 나가지 않은 것이다. 하기사 근현대 철학사에서 어렵기로 손에 꼽히는 두사람 아닌가.

니체를 들뢰즈가 쓴 것이니 말이다.

그러나 예전에 10년전 독서를 시작할 때 하이데거의 니체 연구서를 읽은 적이 있었는데, 그에 비하면 들뢰즈의 이책은 정말 핵심적이고, 명쾌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어째든 세미나 팀 모두 고전을 했다. '68 이후 건축이론'에 걸린 시간에 비하면 훨씬 짧은 기간이지만 쉽지가 않은 책이었다.

 

나에게는 두번째의 여럿이서 읽게된 좋은 기회였다. 혼자 읽기 어려운 책을 이렇게 같이 읽을 수 있는 독서의 동료가 있어서 좋다.

 

니체에 대한 들뢰즈의 독서, 그 해석은 원한, 가책, 금욕적 이상을 포기하는 삶에 대한 예찬(?)이다. 서양의 뿌리 깊은 사유의 기본 틀(들뢰즈의 '사유의 이미지')은 변증법과 허무주의에 기초해 있다. 그것은 권력의지라는 인간의 본성에 뿌리 박고 있는 것인데 그 권력의지는 인간을 ()무적이고, 반응적이고 수동적인 삶을 만든다. 그러한 허무적, 반응적, 수동적 삶을 극복하고 이겨내는 것이 초인의 삶이다. 초인은 인간을 그 위에서 군림하고 이끌고 때로 벌하는 초월적인 존재가 아니다. 인간 스스로 부정적, 반응적, 수동적 단계를 겨쳐 극복된 존재로서의 인간이다.

넘어서는 존재인 초인이기 위해서는 권력의지를 규명해 내야 한다. 그 방법이 계보학이다. 계보학은 기원을 밝혀내는 일반 학문의 방식이 아니다. 모든 삶은 권력의지의 사소한(?) 들뢰즈의 용어로는 미분적인 영향력으로 변형되고 변질되어 왔다. 그러한 영향력을 분석하고 해석해 내는 것이 필요한데 그 방법을 계보학이라고 말한다. 과학이나 논리학, 더구나 변증법은 그러한 미분적 권력의지를 무시한다. 대립과 발전이라는 단순화를 위해서 복수적이고, 현상적이고 미분적인 섬세함에 주목하지 못한다.

 

이 책은 나에게 철학이 현학을 위해서 연구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보는 눈, 세상을 살아가는 행동강령을 위해서 연구되고 사유되는 학문이라는 확신을 다시한번 준 책이다.

쉬운 책은 아니었지만 두번째의 나의 도전에 스스로 대견해 한다. 또 다시 이 책을 일게 될때 조금 더 이해하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삶은 존재이기도하고 생성이기도 하자만 근본적으로는 평가이다. 평가가 내면화된 것이라면 실천이 될 것이다.    

 

 

 

5장 초인 : 변증법에 반대해서

 

1. 허무주의

<허무>가 의미하는 바

허무주의nihilisme란 단어에서 허무는 첫째 비존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무가치를 의미한다. 두번째 의미는 더 이상 의지가 아니라 반작용을 의미한다. 의지의 무는 모든 의지의 부정 결국에는 삶의 혐오이다.

 

2. 연민의 분석

부정적이고, 반응적이며 수동적인 세 허무주의 / 신은 연민으로 죽었다. / 최후의 인간

무의 의지 아래서 보편적 삶이 비현실적이 될 때 개별적 삶은 반응적이 된다. 삶에 대한 부정(비현실적인 삶)과 반응적 삶은 상호 작용을 통해서 뒤엉키지만 결국 부정적 허무주의는 반응적 허무주의가 되고 수동적 허무주의라는 극단적 완성까지 나아간다.

인간(부정적, 반응적, 수동적) (자신에 대한) 연민을 가진 신을 만든다. 연민이란 그것은 영zero에 접근하는 삶의 상태에 대한 관용이다. 연민은 삶에 대한 사랑이지만, 병들고 반응적인 삶에 대한 사랑이다. 그런데 그 신은 인간에 대한 너무나 큰 연민으로 인해서 늙고, 지치고, 의욕의 권태를 느낀 신은 질식해 죽는다.

인간은 그 신의 자리에 자신을 놓는다.

신의 살해자는 <인간들 가운데 가장 흉악한 자>, <고통스런 소리를 내지르며 감춘 수치심으로  가득한> 반응적 인간이다. 반응적 인간은 이미 죽기에도 너무도 지쳐있지만 그는 최후의 인간이라는 신의 살해자의 후손, 한 무리가 된다.

 

니체는 허무주의가 역사 속의 어떤 사건이 아니고, 보편사로서의 인간사의 동력이라고 생각한다. 부정적이고 반응적이며 수동적인 허무주의, 니체에게서 그것은 유태교, 기독교, 개혁사상, 민주주의적이고 사회주의적인 이데올로기 등이 점철된 유일하고 동일한 역사이다. 최후의 인간에 까지 이르는.

 

3. 신은 죽었다.

비극적 명제 / <신은 죽었다>가 지닌 의미의 복수성 / 유태교의 의식, 기독교의 의식(성 바울), 유럽식 의식, 불교적 의식 / 예수와 부처

<신은 죽었다>는 정식은 사변적 명제가 아니라, 비극적 명제, 전형적인 비극적 명제이다. 비극적 명제는 종합적이므로 본질적으로 복수적이고 유형적이며 미분적이다.

(1) 부정적 허무주의의 관점에서 : 유태교적이고 기독교적인 의식의 계기

    1>유태의 신은 자신의 아들을 그 자신과 유태 민족으로부터 독립시키기 위해 죽음에 처한다. 모두를 위한 보편적 신으로 만드는 수단으로서.

    2> 아버지는 죽고 아들을 대신 신으로 만들어 주는데 그 신은 사랑의 신, 반응적 삶의 사랑이다.

    3> 성 바울은 그 죽음을 독점하고 그 죽음에 대한 (자신의) 해석을 제공한다. 예수는 우리 죄지은 자를 위해서 죽은 것이다. 기독교의 의식 속에서 사람들은 원한을 숨길 뿐 아니라 그 방향을 바꾼다. 유태교의 의식은 원한의 의식이었고, 기독교의 의식은 가책이다. 기독교의 의식은 방향이 전환되고 뒤집힌 유태교의 의식이 된다.

(2) 반응적 허무주의 관점에서 : 유럽식 의식의 계기

    4> 신은 반응적 삶의 사랑으로 질식한다. 신은 그가 너무도 사랑한 배은망덕자에 의해서 질식당한다.

(3) 수동적 허무주의 관점에서 : 불교적 의식의 계기

바울의 예수와 달리 진정한 예수는 즐거운 소식, 원죄 관념의 제거, 모든 원한과 모든 복수심의 부재, 결과로서 조차 모든 전쟁의 거부, 사랑의 마음 아래서의 신의 왕국의 계시, 그리고 그의 이론의 증거로서의 죽음의 수용이다. 예수는 성 바울이 만들고자 했던 것의 반대이며, 진정한 일종의 부처, <거의 알려지지 않은 영토 위에서의 부처>였다. 그는 반응적 삶에게 쾌락주의를, 최후의 인간에게 고귀함을 제공했다.

(그러나 그 예수와 ) 불교는 수동적 허무주의의 종교이다. <불교는 끝을 위한 종교이며 문화의 무기력이다. 기독교는 그 문화를 아직 발견하지 못하고 있고, 그것이 만약 필요하다면, 그것을 창조해 낸다>

 

4. 헤겔주의와 반대해서

변증법 속에서의 보편자와 개별자 / 대립의 추상적 특징 / 변증법에 반대하는 <누가?>라는 의문 / 피히테, 허무주의, 변증법 속에서의 반작용

(헤겔의) 변증법은 해석을 간단하게도 다루지 못한다. 그것은 결코 징후들의 영역을 뛰어 넘지 못한다. 변증법은 대립으로 살아간다. 그것들은 미분적인, 다시 말해서 미묘하고 은밀한 메커니즘들즉 위상학적 이동들, 유형학적 변형들을 무시한다. 그것들은 힘들, 그것들의 성질들, 그것들의 관계들이 파생하는 현실적 요소를 무시한다.

그 모든 불충분성은 동일한 기원을 기지고 있다. <누가?>라는 의문에 대해 무지하다는 것이다.

반응적 힘들의 편에서 고려할 때 비분적 요소는 전복되고, 거꾸로 사색되고, 대립이 되었다. 대립 속에서 표현되는 것은 바로 반응적 힘들이고 부정의 노동 속에서 표현되는 것은 무의 의지이다.  

 

5. 변증법의 화신들

변증법의 역사 속에서의 슈티르너의 중요성 / 재점유의 문제 / 자아의 이론으로서의 변증법

변증법의 사변적 동력은 모순과 그것의 해결이다. 그러나 그의 실천적 동력은 소외와 소외의 제거, 소외와 재 점유이다. 상대적 재점유는 여전히 절대적인 소외들이다. 신학과 경쟁하는 인간학은 자아를 인간의 속성으로 만든다. 그러나 변증법은 자가가 마침내 주인이 되지 않는 한 멈추지 않을 것이다. 헤겔의 저서에서 타협이 문제였다. 변증법은 신속하게 종교, 교회, 국가, 제 것을 먹여달라는 모든 힘과 타협했다.

변증법은 역사를 좋아하고 제어하지만 그것 자체는 그것이 고통스러워하고 제어하지 못하는 어떤 역사를 가지고 있다. 역사와 변증법의 재결합의 의미는 이성의 실현, 자유의 실현이 아니고, 종으로서의 인간의 실현도 아니며, 허무주의와 다른 무엇도 아니다. 슈티르너 허무주의가 변증법의 진리임을 보여준 변증법주의자이다.    

 

6. 니체와 변증법

초인과 전환의 의미

니체는 독일 철학의 신학적이고 기독교적인 특징, 허무주의적 관점에서 빠져 나올 수 없는 무능함, 자아 또는 인간의 환상인 그 철학의 무능함, 변증법적 변형의 기만적 특징들을 (삶의 모든 것을 걸고) 고발한다.

기독교, 휴머니즘, 이기주의, 사회주의, 허무주의, 역사와 이론들, 변증법의 화신들이 우월한 인간의 이론을 형성한다. 니체의 비판의 대상은 그것이다.

 

7. 우월한 인간의 이론

우월한 인간의 여러 인물들 / 우월한 인간의 양면성

니체는 차라투스트라 4부에서 우월한 인간을 이야기 한다. 그들은 예언자, 두명의 왕, 거머리를 가진 인간, 마술사, 마지막 교황, 인간들 가운데 가장 흉악한 자, 자원한 거지, 그리고 그림자이다.

우월한 인간은 반응적 인간이 그 속에서 그 자신을 <우월한 것>으로 표현하고 게다가 자신을 신격화 시키는 이미지이다. 

 

8. 인간은 본질적으로 <반응적>인가

인간은 반응적 생성이다 / <당신들은 실패한 본성에 속한다> / 작용과 긍정 / 우월한 인간과 관련한 인간 니체의 상징체계 / 두마리의 불<>

원한과 가책은 인간의 인간성을 구성한다. 허무주의는 보편사의 선험적 개념이다. 그래서 허무주의를 가책과 원한에서 해방시키는 것은 인간을 극복하고 인간을 파괴하며 가장 선한 인간 조차 파괴하는 것을 의미한다. 니체의 비판은 인간의 의연에 도전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본질 자체에 도전한다. 인간은 자신의 본질 속에서 소위 대지의 피부병이다.

차라투스트라는 그들의 <방문객들>에게 <당신들은 실패했고 실패한 본성들에 속한다>고 말한다. 니체는 인간의 종적 활동이나 문화는 그 활동의 원리를 실패하는 원리로, 그 활동의 산물을 실패된 산물로 만드는 반응적 생성의 가정된 항으로서만 존재한다고 말한다. (우월한 인간의 하나인) 그림자는 목적을 상실했다. 그가 그것에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도달한 목적 자체가 상실된 목적이기 때문이다. 종적인 문화활동은 가짜 불개이다.

 

초인과 우월한 인간의 차이는 그들 각각이 도달하는 목적에 있어서 뿐 아니라 그들 각각을 생산하는 심급에 있어서도 본래적이다.

인간의 본질과 인간에 의해 점유된 세계의 본질, 그것은 모든 힘들의 반응적 생성, 허무주의일 따름이다. 인간과 그의 종적 활동, 그것이 바로 대지의 두 피부병들이다.

우월한 인간의 계획과 차라투스트라 자신의 계획은 유사하지만 본성상 심오한 어떤 심급의 차이가 있다. 우월한 인간은 활동의 추상적 요소에서 멈춘다. 그러나 이제 필요한 것은 부정 조차도 긍정하는 힘이다. 본성을 변화시키는 것, 그것들은 더 이상 인간의 종적 활동이 아니라 디오니소스의 긍정이다. 긍정의 요소는 바로 초인이다.

 

9. 허무주의와 전환 : 집약된 지점

자신에 의해서 극복되고 완성된 허무주의 / 권력의지 : 인식의 종류와 존재의 이유 / 멸망하기를 원하는 인간 또는 적극적 부정 / 부정의 개종, 개종의 지점

허무주의 군림은 막강하다. 그것은 삶보다 우월한 가치들 속에서도 표현되지만 그것을 대체하는 반응적 가치들 속에서, 또 가치가 존재하지 않는, 최후의 인간의 세계 속에서도 표현된다. 그것은 항상 군림하는 비하의 요소, 권력의지로서의 부정, 무의 의지로서의 의지이다. 부정의 왕국에서는 항상 삶 전제가 비하되고 반응적 삶이 승리한다.사실 힘들의 반응적 생성도 마찬가지로 권력성질로서의 부정이다.

니체는 전환, 가치 전환을 주장한다. 가치들의 변화가 아니라 가치들의 가치가 파생되는 요소 속에서의 변화이다. 비하 대신 찬사, 권력의지로서의 긍정, 긍정적 의지로서의 의지이다.

적극적 생성이 우주 속에 등장하는데 그것은 권력의지로서의 긍정과 같다. 문제는 <허무주의를 어떻게 이겨낼 것인가? 가치들 자체의 요소를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가?>이다.

 

우리가 원한, 가책, 금욕적 이상, 우리에게 권력의지를 인식하도록 강요하는 허무주의 속에서 그것의 표명을 이해한다면 권력의지에 대해서 거의 아무 것도 알 수 없을 것이다. 권력의지는 마음이지만 우리에게 낯선 힘으로 드러나는 복수심 없이 우리가 마음에 대해 아무 것도 알 수 없다. 권력의지는 신체이지만 우리에게 그것을 인식시키는 질병 없이 우리는 신체에 대하여 아무것도 알 수 없다. 그래서 무의 의지는 권력의지의 성질일 뿐 아니라, 권력의지 일반의 인식 이유이다.

우리는 우리가 그것을 인식하는 것인 그 형태와 구별되는 형태 아래서 권력의지를 <사유한다> 그러므로 영원회귀의 사유는 우리의 모든 인식 법칙을 능가한다. 우리가 권력의지로부터 인식하는 것은 고통과 체형이지만, 권력의지는 또 미지의 기쁨, 미지의 행복, 미지의 신이다.

그리고 긍정은 권력의지의 성질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권력의지일반의 존재이유이다. 부정이 모든 권력의지의 인식이유이었던 것처럼  그것은(긍정) 권력의지의 존재이유이다. 긍정으로부터 새로운 가치들이 파생한다.

허무주의는 권력의지의 인식이유로서 부정의 성질을 표현한다. 그러나 그것은 반대되는 성질 속에서, 그 동일한 의지의 종재 이유로서의 긍정 속에서 전환되지 않는 한 완성되지 않는다. 아리아드네에게 대답하는 중에 디오니소스가 적절한 신비를 지닌 채 예고하는, 고통이 기쁨으로 변하는 디오니소스적 전환은 <사람들이 소로를 사랑하는 것이 틀림 없다면 우선 서로 증오해야 하지 않겠는가>이다. 다시 말하면 만약 네가 나를 긍정으로 느끼고, 긍정인 나와 혼인하면 나를 긍정으로 생각함이 틀림없다면 너는 나를 부정으로 인식해야만 하지 않겠는가?

 

무의 의지는 반응적 인간을 넘어서고 반응적 힘들은 무의 의지와의 동맹을 파기하고, 무의 의지는 자기차례가 되면 반응적 힘들과의 동맹을 파괴한다. 그것은 인간에게 새로운 관심을 일깨운다. 그것은 니체가 자기-파괴, 적극적 파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것은 최후의 인간의 수동적 소멸과 혼동되지 않는다. 차라투스트라는 적극적 인간의 파괴를 노래한다. 그는 극복되기를 원한다. 그는 인간적인 것을 넘어서가고, <다리를 건너가면서> 이미 초인의 길 위에 있다. <나를 인식하기 위해 살고, 언젠가는 초인이 살도록 하기 위해서 인식하고자 하는 자를 사랑한다. 그는 또 자기 지신의 몰락을 원한다.>

적극적 파괴는 무의 의지의 변환의 지점, 순간을 의미한다. 파괴는 반응적 힘들과 무의 사이의 동맹이 결렬될 때 후자가 개종하고, 긍정의 편으로 가면서 반응적 힘들 자체를 파괴하는 긍정하는 힘과 관계를 맺는 순간에 적극적이 된다.

 

10. 긍정과 부정

나귀의 예 / 차라투스트라의 원숭이, 악마 / 긍정의 부정성

전환과 가치전환은 다음을 의미한다.

(1)        권력의지 속의 성질의 변화

(2)        권력의지 속에서 인식 이유의 존재 이유로의 이행

(3)        권력의지 속에서의 요소의 개종

(4)        권력의지 속에서의 긍정의 군림

(5)        알려진 가치등에 대한 비판

(6)        힘들의 관계 전복

니체는 긍정을 부정의 전제조건 그리고 부정의 직접적인 결과로 소개한다. <나는 내 파괴력에 부합하는 정도로 파괴하는 기쁨을 안다> 자기 자신만큼 어마어마하고 무제한적인 부정이 직접적으로 뒤따르지 않는 긍정은 없다, 또 엄청난 부정이 자신을 앞서가지 않도록 하는 긍정은 없다. <긍정의 본질적 조건 중에 하나는 부정과 파괴이다>

 

11. 긍정의 의미

나귀와 허무주의 / 현실적인 것의 소위 긍정성에 반대해서 / <이시대의 인간들> / 긍정하는 것은 짐을 지는 것도 떠 맡는 것도 아니다. / 존재의 이론에 반대해서

니체에 의하면 긍정은 두 부정을 포함하고 있지만 정확히 변증법과는 반대이다. 낙타와 나귀는 아니오라고 말하는 부정이 없는 긍정 예만이 있다. 무거움의 정신은 부정의 정신, 허무주의에 의해 반응적 힘에 의해 변화된 정신이다. 나귀는 모든 기독교적 미덕 속에서, 그것을 짐 지우는데 이용하는 힘 속에서 반응적인 것의 등정이 된다.

나귀는 우선 예수이다. 예수야말로 무거운 짐을 스스로 진다. 바로 부정의 결실들이 전형적인 긍정의 심비를 품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그것들을 짊어진다. 그러나 그 같은 결과 속에서, 현실적인 것과 그것의 수락은 있는 그대로, 즉 거짓 적극성, 거짓 긍정성인체로 있다.

 

헤겔이래 철학은 존재론과 인간학, 형이상학과 인본주의, 신학과 무신론, 가책의 신학과 원한의 무신론이 이상한 혼합으로 드러난다.

그것은 진리의 진정성이나 현실의 긍정성과 혼동하는 변증법이다. 헤겔의존재는 순수하고 단순한이다. 그리고 그 존재가 무와 더불어, 말하자면 자기 자신과 더불어 형성하는 생성은 완전히 허무적인 생성이다.

니체는 변증법에 대하여 다음을 주장한다. 1) (변증법에서의) 존재, 진리, 현실은 허무주의의 화신이다. 2)수락으로, 존재에 긍정하는 것의 긍정으로, 진리의 진실성이나 현실의 긍정성으로 인식된 긍정은 거짓 긍정이다.(나귀의 예) 3)긍정의 거짓된 입장은 여전히 인간을 보존하는 방식이다. 존재가 짐인한, 반응적 인간은 짐을 지기 위해 거기에 있다.

 

사는 것은 평가하는 것이다. 사유의 세계의 진리도, 감가 세계의 현실도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평가이고, 특히 감각될 수 있고 현실적인 것 조차 평가 이다.

권력의지의 다른 성질, 즉 긍정하는 것은 평가하는 것이다. 긍정하는 것은 존재하는 것의 짐을 떠 맡는 것도 아니고, 살아 있는 것을 해방시키고, 짐을 덜어주는 것이다. 긍정하는 것은 가볍게 만드는 것이다.

<새로운 가치들을 창조하는 것, 사자도 그것을 아직 할 수 없다. 그러나 새로운 가치들의 창조를 위해서 자기를 자유롭게 만드는 것, 그것은 바로 사지의 힘이 할 수 있는 것이다.

긍정의 의미는 니체 철학의 근본적인 세가지를 고려할 때만 명확해 진다. , 진리도 현실도 아니라 평가이고, 수락으로서의 긍정이 아니라 창조로서의 긍정이며, 새로운 삶의 형태로서 초인이란 점이다. 

 

12. 이중적 긍정 : 아리아드네

긍정의 긍정(이중적 긍정) / 아리아드네의 신화, 미로 / 긍정된 긍정(두번째 힘) / 차이, 긍정, 영원회귀 / 디오니소스의 의미

최초의 긍정(생성)은 존제이지만 그것은 두번째 긍정의 대상으로서만 존재이다. 그 두 긍정은 총체적으로 긍정하는 힘을 구성한다.

디오니소스적 생성은 존재이고 영원이지만 상응하는 긍정 자체가 긍정될 때 한에서 이다. 존재의 영원한 긍정, 나는 영원한 너의 긍정이다. 영원회귀는 생성과 존재를 <최대한 접근시키고>, 그것은 서로를 서로에 의해 긍정시킨다. 그 접근을 행하기 위해서는 두번째 긍정이 필요하다. 그래서 영원회귀 자체는 결혼반지이다. 영원회귀를 구성하는 것에 의해서 디오니소스는 최초의 긍정, 생성, 존재 이지만, 바로 두번째 긍정의 대상일 다름인 존재로서의 생성이다. 아리아드네는 그 두번째 긍정이고 아리아드네는 약혼녀, 애인인 여성의 힘이다.

미로는 영원회귀 자체를 가르키고, 무위식, 자신을 의미한다. 미로는 생성이고 생성의 긍정이다. <나는 너의 미로아다> 미로는 우리를 존재로 인도하는 것이다.

 

우리가 긍정과 부정을 권력의지의 성질로 간주할 때, 그것들이 일의적 관계를 가지고 있지 않고 복수적 관계를 가지고 있음을 이해한다.

차이는 있는 그대로의 긍정의 본질이다. 부정이 그것에 고유한 대립의 고통과 노동이듯이 긍정은 자기 자신의 차이의 향유와 놀이이다.

 

13. 디오니소스와 차라투스트라

선택으로서의 존재 / 차라투스트라의 전환 : 사자 / 전환에서 영원회귀까지, 그리고 그 반대 / 웃음, 놀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