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뢰즈에 관한 책을 세권을 읽었다. 매권마다 꼭 독후감을 쓸려고 했지만 게으름만한 적은 세상에 없다.
오늘 아침. 그 것 중에 하나 ‘들뢰즈: 철학과 영화’ 쉬잔 엠 드 라카트 저작의 책을 끝냈다.
다른 두 권의 책은 ‘질 들뢰즈의 시간시계’, ‘들뢰즈 커넥션’이다.
두번째 책은 첫번째 책과 그 대상이 같다. 그 대상이란 들뢰즈의 ‘시네마1’, ‘시네마2’라는 책이다.
사실 시네마1과 시네마2를 덤벼들었다가 잘 읽혀지지 않아서 해설서를 먼저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그것도 만만치 않았다. 계속해서 반복하는 아침마다의 화장실 독서가 도저히 읽어갈 수 없는 책들이었다. 우선 이 책들이 권하는 선행독서가 베르그송이기에 더욱 쉽지 않은 것이었다. 베르그손도 난감한 철학자이기는 마찬가지이므로.
이미지, 물질, 운동
‘들뢰즈는 영화에 대하여 특별한 지위를 부여하고 있는 듯이 보이는 데 그 이유는 1)비철학적 새로운 표현 수단을 취하는 것이 철학의 임무-들뢰즈가 니체에게서 받아들인 사상-라고 생각하고 있고, 영화는 본질적으로 기계적 특성 때문에 다른 예술 보다 ‘사유의 이미지’를 탁월하게 계시한다’ 라고 저자 라코트는 영화라는 주제를 철학서로 다루는 들뢰즈의 관심으로 시작한다.
여기서 ‘사유의 이미지’라는 들뢰즈이 개념이 먼저 나오는데 이것은 ‘내재성의 평면’이라는 또 다른 들뢰즈의 개념어과 동의적으로 쓰인다. 어떤 철학적 사고 체계의 기본이 되는 틀이나 바탕을 말하는 것 같다.
들뢰즈는 철학은 개념의 창조이다라고 말한다. 과학은 기능, 지시관계의 창조이고 예술은 감각적 대상의 창조이다. 그런데 들뢰즈는 모든 개념은 역사를 갖고 있다고 말한다. 이 말은 머든 개념은 시간 안에 기입되어 있으며 특정 시점에 만들어진 문제에 상응함을 말한다. 만일, 개념이 진정한 의미에서 창조된 것이라면 그것은 결코 무에서 창조된 것이 아니다. 들뢰즈는 베르그송의 ‘물질과 기억’ 일장에서 정의하고 있는 이미지의 개념을 빌려온다.
베르그송은
이미지 = 물질 = 운동
이라는 독창적인 등식을 제세한다.
‘나는 이미지들의 집합체를 물질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이미지들, 다만 나의 몸이라는 특별한 이미지의 가능한 작용을 가리키는 이미지들은 물질에 대한 지각이라고 부른다.’ ‘베르그송의 유물론적 관점에서 볼 때 사유의 내적 운동(시냅스의 순간작용과 신경계를 통과하는 흐름들)을 지배하는 법칙은 물리적 몸체의 운동을 지배하는 법칙과 다르지 않다….이미지를 산출하지 않는 운동이란 없다, 즉 실행된 운동에서 분리할 수 있는 이미지란 없다.’ – 들뢰즈의 시간기계/데이비드 노만 로드윅
그리하여 뇌는 표상을 형성하는 의식의 장소가 아니라 간격으로 이해된다. 다시 말해 몸은 표상의 장소가 아니라 행위의 중심이고, 뇌는 아무 것도 창조해 내지 않고 단지 받아들인 운동에 대해 다른 운동으로 응답하기 때문에 이미지는 뇌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이미지는 작용 반작용의 총체 즉 운동이다. 물질도 이미지의 총체로서 즉 이미지와 물질과 운동의 등식이 성립한다.
들뢰즈가 운동-이미지와 시간-이미지에 대한 개념을 만드는데 핵심은 베르그송의 ‘지속’의 개념이다.
들뢰즈는 시네마-1에서(p21) 베르그송의 ‘창조적 진화’를 인용한다.
“순간이 운동의 부동적 단면인 것처럼, 운동은 지속duree, 즉 전체Tour 혹은 어떤 전체 un tout의 동적인 단면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운동이 훨씬 더 심오한 그 무엇, 즉 지속 혹은 전체 안에서의 변화를 표현한다는 것이다. … 예컨데 물질은 운동하지만 변화하지 않는(다고 생각되어 왔지만) 이제 운동은 지속 혹은 전체 안에서 변화를 표현한다. (중요한 것은) 이 표현이고 … ‘전체-지속’의 동일화이다. … 운동이란 공간 안에서의 이동translation이다. 그런데 매번 공간 안에서 부분들이 이동할 때마다 전체 안에서도 질적인 변화가 있게 된다. 베[르그손은 이에 대하여 ‘물질과 기억’에서 다양한 예를 제공하고 있다. (중요한 예이지만 분량이 많아서 생략 p22)
베르그송이 이동의 배후에서 발견한 것은 진동vibration, 발광rayonnement이다. 우리의 오류는 운동하는 것이 특질들의 외부에 존재하는 불특정한 요소라고 믿는 것이다. 그러나 특질들 조차도 이 요소들이라고 하는 것들의 운동과 동시에 변화하는 순수한 진동들이다.
‘창조적 진화’에서 베르그송은 이미 우리가 잘 알고 있어 더 이상 놀랄 것도 없는 예를 들고 있다. … 설탕의 임자들을 떼어서 물 속에 띄우는 이 이동의 운동 전체, 즉 유리잔의 내용물 속에서의 변화를 표현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것은 설탕이 있는 물에서 설탈물로의 이행을 말한다. 내가 숟가락으로 저어주면 이 운동을 가속시키는 것이 되며, 동시에 이제는 숟가락 까지 포함하는 전체 역시 변화시켜, 가속된 운동은 계속 전체 안에서의 변화를 표현하게 된다. ‘물리학과 화학이 연구하는 질량과 분자들의 아주 표면적인 이동들deplacement이 “깊은 곳에서 만들어지는, 더 이상 이동이 아니라 변형transformation인이 생생한 운동에 갖는 관계는, 동적인 것의 정지 상태가(제논의 날라가는 화살)가 공간에서의 그 동적인 것의 운동에 갖는 관계와 같아진다.
부동적 단면들 : 운동 = 동적인 단면으로서의 운동 : 질적인 변화
베르그송이 이 설탕물 잔을 가지고 말하려고 한 것은 … 나의 기다림이 지속을 정신적이고 영적인 현실로서 표현한다는 것이다.
… 전체가 주어질 수 없는 것은 전체가 ‘개방성’이며 그 속성이란 끊임 없이 변화하고 계속 새로운 것을 솟아나게 하는, 다시 말해 지속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주의 지속은 그 안에 일어날 수 있는 창조의 넓이와 같은 것이다” … 그러므로 운동은 어떤 의미에서 두 측면을 가지고 있다. 한편으로는 대상이나 부분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지속 또는 전체를 표현하는 것이다. 그것은 지속으로 하여금 속성을 변화시키면서 대상들 속에서 분활 하도록 하며, 대상들로 하여금 스스로 심화하면서 그 윤곽을 상실하면서 지속 안에 결합하게 한다. … ”
좀 길지만 시네마-1의 ‘운동에 관한 논제들’의 부분을 인용했다. 이 베르그송적인 지속은 현대 구조주의와 대척점에 서 있으며 시간을 공간 안에서 전개하려는 모든 인식론들과 대척점에 있다. 아니면 적어도 시간을 공간적인 단면들의 연속으로 이해하려는 경향이 있는 모든 인식론들과 대척점에 있다.
운동-이미지, 시간-이미지
이 모든 논의가 들뢰즈의 운동-이미지와 시간-이미지를 이해하는데 주요하기 때문이다.
운동-이미지는 시간에 대한 간접이미지이고 시간-이미지는 시간에 대한 직접이미지이다.
운동-이미지는 “감각-운동도식”이라 부르는 것으로 특징 지워진다. 이 감각 운동 도식을 보여주는 것이 (영화의) 몽타주이다. 몽타주는 이미지들이 서로 조화를 이루도록 하고, 그 결과 이미지들은 서로 어울려 전체를 형성한다.
‘운동-이미지’와 ‘시간-이미지’ 사이에는 이제 더 이상 시각적인 예술로서가 아니라 <시간의 구조를 가시화시키는 것이 목적인> 시간의 예술로서 고려되는 영화에 대한 점진적인 탈공간화가 작동되고 있다.
(물론) 운동-이미지에는 두 측면이 있다. 그 중 대상과 관계하는 한 축면은 대상들의 상대적인 위치를 변화시키고, 전체와 관계하는 다른 측면은 전체의 절대적인 변화를 표현한다. 위치들은 공간에 있지만, 변화하는 전체는 시간 안에 있다.
(시간-이미지는 다르다) 들뢰즈는 시간-이미지를 특징 짓는 것은 운동-이미지에서처럼 필연적으로 세계의 고간과 상대적으로 전개되는 연대기적인 시간이 아니라, ‘비연대기적인’ 시간이고 순수시간이며 초월적인 형태의 시간이라고 설명한다.
운동-이미지는 시네마-1의 부제이고 시간-이미지는 시네마-2의 부제이다. 들뢰즈는 현대연화를 두가지로 구분한다. 운동-이미지적의 영화와 시간-이미지의 영화이다.
운동-이미지의 영화는 오직 매개를 통한 사유 안에서만 존재한다. 서사(네러티브)는 운동-이미지인 경우는 몽타주의 산물이다. 그런데 시간이미지의 경우에 시간의 이질성 안에서 사유되기 때문에 거짓된 것이 된다. “운동은 더 이상 고간에서의 물리적 운동이라고 생각할 수 없다. 운동은 시간 안에서 변화형식으로 재 정의 되어야 한다. 이것이 궁극적으로 ‘시간-이미지’에서의 운동이다. 시간의 직접적인 이미지는 시간의 창의성을 보여 준다. 다시 말해서 반복되는 매 순간마다 새로운 것과 의외의 것을 나타나게 하는 가능성을 보여 준다.
영화의 본질은 사건, 다시말해 시간의 솟아오름이나 특이성을 보여주는 편집이 된다.
영화는 문학과 마찬가지로 들뢰즈가 환경milieux이라고 부르는 것을 보여주어야 하지만 다만 이미지들을 이용해서 그렇게 해야 한다. 이 환경 안에서 작동하고 있는 것이 바로 힘이다. 세계는 서로서로 작용하는 힘들로 구성되어 있다.
현실적인 것과 잠재적인 것
들뢰즈의 중요한 관심 중에 하나는 능력(권능이라고 번역되는 곳도 있다)의 문제와 관련된 잠재적인 것의 문제이다.
현실적인 것과 잠재적인 것은 대립되지만 서로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그것들은 하나의 전체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잠재적인 것은 실재적인 것에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현실적인 것에만 대립된다.” 실재와 대립되는 것은 가능적인 것이다. 그렇다면 잠재적인 것과 가능적인 것은 어떻게 다른가. 가능적인 것의 과정은 실현realization인 반면, 이미 실재 그 자체인 잠재적인 것의 과정은 현실화actualization 이다.
라코트는 현실화는 재현이 아니라 창조라고 말한다. 현실적인 것과 잠재적인 것에 대해 사유하기 위해서는 그것들은 시간에 관한 사유 속에 포함시켜야 한다. 시간은 현실적인 현재와 순수과거 혹은 잠재적인 것의 두 측면으로 표현된다. 순수 과거, 잠재적인 것은 일종의 분해된, 혹은 애매하고 해체된 회상이다. 그래서 그러한 잠재적 과거는 의식의 생산물이 아니며 연대기적이자도 않다.
현실적인 것과 잠재적인 것에 관한 사유를 통하여 라이프니츠이 불공가능성incompossibility이라는 관념을 비판한다. 영화는 힘, 능력은 거짓된 을 만들어 내는 능력이다. 즉 거짓된 역능이다.
크리스탈-이미지
현실적인 것과 잠재적인 것의 관계에서 꿈-이미지, 회상-이미지, 세계-이미지와 같은 불완전한 이미지를 논한다. 회상-이미지는 자기 자신을 위하여 베르그송이 ‘순수 회상’이라고 부르는 잠재성을 현실화 한다. 회상-이미지는 잠재성을 현실화하고 자신이 현실화하는, 다시 말하면 자신이 연대기적인 시간 안에 기입되는 어떤 회상을 찾으러 순수 과거 속으로 들어 간다. 그리고 어떤 회상에 시공간적인 내용을 부여해 준다. 회상-이미지는 아직 직접적으로 시간을 보여주지 못한다.
반면 그리스탈-이미지는 다른 이미지들과 달리 시간의 현실성과 잠재성을 함께 갖고 있다. 이 둘 사이에 합생이 존재한다.
들뢰즈가 <시민 케인 Citizen Kane>에서 펼치고 있는 논의를 보자
어떤 순간에 케인은 서로 마주하고 있는 두개의 거울 앞을 지나간다. 인물의 이미지는 무한이 등식되고 시각적으로는 어떤 인물이 진짜 그 인물인지 더 이상 알 수 없다. “잠재적인 이미지들이 이렇게 증식할 때에, 그 이미지들의 집합은 인물의 모든 현실성을 흡수 한다. 동시에 그 인물들은 다른 잠재성들 중의 하나의 잠재성일 뿐이다. 이 운동은 그 이미지들을 하나의 이미지에서 다른 하나의 이미지로 무차별 이행하게 한다. 이 이미지들은 하나의 동일한 이미지인 크리스탈-이미지의 식별불가능한 두 측면을 형성한다.
들뢰즈는 네가지 유형의 크리스탈-이미지를 구분한다. 오퓔스의 작품에서 볼 수 이/t는 완전하고 완성된 크리스탈, 르누아르의 균열된 크리스탈, 펠리스에서 볼 수 있는 형성과 증가 과정에 있는 크리스탈, 그리고 마지막으로 비스콘티 작품의 특징인 해체되어가는 크리스탈.
현실적인 것의 재현으로서의 운동-이미지와 잠재적 것의 재현으로서의 시간-이미지
현실적인 이미지는 유기적인 묘사들을 함축한다. 이것은 들뢰즈 철학 전체에서의 유기적인 것의 비판과 관계 있는 것 같다. 대상을 유기적으로 묘사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운동-이미지들이다. 운동-이미지는 다름 아니라 시간의 현실적인 측면을 제시하는데 그 이유는 (이러한 단계 에서는) 시간이란 운동을 따라서만 사유되고, 그것은 곧은 선으로서 그 선위에서 현재가 자리바꿈하며, 공간화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간의 직접적인 이미지인 시간-이미지는 과거 층 들의 공존과 현재 지점들의 동시성이라는 두 개의 형식 하에서 우리에게 시간의 잠재적인 측면을 제세해 준다.
잠재성에서 현실성으로의 이행은 개인의 의식에 의하여 생산되는 무의식적인 상태<이는 프로이트의 무의식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기 때문에 오히려 의식이 없는 상태라고 해야 할 것이다> 에서 의식적인 상태로의 이행으로도 볼 수 있다. 하나의 이미지에서 다른 이미지로의 이행은 역사적인 것도, 연대기적인 것도 아니다. 그 이행은 다른 질서에 속한다. 이 이행은 영화적 이미지의 성격을 가지고 있고, 본질적인 것이며, 두 이미지의 형태로 할당되는 것이다.
세개의 가능한 시간-이미지가 있다. 하나는 과거에 기초하고 있고, 하나는 현재에 기초하고 있다. 들뢰즈는 세번째 시간-이미지를 제안한다.여기서는 이야기를 꾸며내는 것을 원칙으로하는 이미지, 서사체narration의 방식으로 기능하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의 방식으로 기능하는 이미지가 중요하다. 경국 거짓된 것의 역능들에 대한 것이 시간-이미지의 핵심이 된다.
이것이 크리스탈-이미지의 내용이다. 크리스탈, 혹은 결정체,
시간-이미지는 운동-이미지가 남겨준 유산의 변형의 역능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운동-이미지, 시간-이미지와 함께 작동되고 있는 것은 상이한 차원들과 방식으로 표현되는 역능들이다. 에이젠슈체인, 변증법적 몽타주, 파토스의 경우를 예로 들어 보면, 크로즈업의 삽입을 통해 표현되는 이 질적인 도약은 역능의 변화를 표현한다. “또한 파토스는 이미지의 내용물 안에서의 변화만이 아니라 형식 안에서의 변화를 표현한다. 사실상 이미지는 역능을 변화시켜야만 하고, 우월한 역능으로 이행해야만 한다.
들뢰즈는 범주들, 집합들, 일반성들 같은 것에 전혀 호소하지 않는다. 존재는 본질적으로 긍정affirmation이고 그렇게 때문에 반변증법적 방식으로 사유되어야 한다.
부정적인 것은 존재가 존재와 동시에 비존재로 말해진다는 것을 함축하면서 다의성을 재 도입한다. 존재자들, 혹은 시물라크르들은 존재의 양태들이다. 존재는 초월적이지 않고 자신의 완전히 특이한 역능의 변화들의 다양체를 통해서 정의될 수 있을 뿐이다.
이책의 말미에서 내재성의 평면과 사유의 이미지를 다시 정리하는데 이 글의 시작에 언급했으므로 이만 정리한다.
라코트도 다른 들뢰즈의 해석자들과 마찬가지로 시네마 1,2를 일종의 철학서로 본다. 그래서 자신의 해서도 들뢰즈의 개념들을 영화와 연관하여 설명하는데 많은 노력을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개념에 대한 이야기이지만 세상을 어떻게 보는가는 판단을 요구하고 그 판단의 새로운 그리고 옳은 방향을 열어준다.
능력, 감수성, 강도적인 사유, 재현이 아니라 현현, 초월성이 아니라 내재성.
이미지는 그 자체가 물질이기 때문에 아무 것도 재현하지 않는다. 마치 건축의 본질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다. 건축의 사건은 본질이다. 건축은 공간을 만들고, 형태를 만든다. 그것 기능의 구성, 공간의 형성, 형태의 표현이 바로 사건 혹은 이미지이고 건축가는 그 사건을 만든다. 재현은 없다. 개념, 기능, 형태 혹은 이미지의 창조만이 있다.
건축에서 시간의 문제도 운동-이미지, 시간-이미지와 유사한 문제이다.
잠재성을 발견하고 표현하는 문제이므로. 시간의 문제, 난삽 생각의 중첩으로 만들어지므로 순수시간, 크리스탈적인 접근인 것이다.
시간-이미지의 문제. 시간을 직접적으로 드러낸다는 것…
2007-07-07 이 관 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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