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알기로 들뢰즈의 저서 중 마지막 번역인 ‘주름, 라이프니츠와 바로크’를 읽었다. 꽤나 여러 고비를 겪으면서 그의 책을 읽어 왔지만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중간에 포기를 여러 번 했었다. 그래도 다 읽고 나면 어렴풋하게 대강이라도 남는 것이 있을까 하고 버티어 낸다. 존재의 철학자가 아닌 생성의 철학자인 들뢰즈는 예정조화, 단자론, 주름, 미분과 극한의 철학자인 라이프니츠에 대한 독특한 독해를 감행한다. 주름이 가지는 구체적, 혹은 형상적, 비유적, 알레고리적 의미를 통해 영혼을 설명한다. 주름은 영혼의 모습이다. 영혼은 세계이며 모나드(단자)이고 그것은 주름의 형상, 내용, 깊이, 전개, 표현의 양태를 가진다. 영혼의 모습은 잠재적이고 현실태를 갈망한다. 영혼은 신체라는 선택을 통해서 현실화 한다. 영혼과 신체는 지각을 통하여 관계한다. 지각은 영혼 안에서는 애매하고 신체 안에서는 선명하다. 지각을 통하여 애매함과 선명함은 관계하고 그것이 주름이 펼쳐지는 모습이다.(?) 종이학이 되기 전 혹은 접혀서 꽃이 되기 전의 한장의 종이에는 무한히 많은 주름의 잠재태가 있다.(너무나 많아서, 혹은 너무나 많이 겹쳐 있어서 보이지 않는다.) 이 잠재태는 선택 혹은 포착(파악-화이트헤드)을 통해서 생성(becoming)으로 나아간다. 접힘은 그 형태가 드러나는 펼침 혹은 설명ex-pli-cate이다.(ex는 펼쳐지다, pli 는 주름이라는 뜻) 접히어 그 내용 혹은 형태가 구체화 되는 것은 구체적인 설명을 통하여 감추어져 있던 것이 펼쳐지는 것으로 접힘folding은 곧 펼침unfolding이 된다. 이것의 영혼 즉 주름으로 가득찬 단자(모나드)이다. 모나드는 세계를 가지고 표현하고 담고있다. 신체는 영혼과 관계하지는 않지만 병립하며 귀속된다.(?) 영혼이 잠재태와 현실태와 관계된다면, 신체는 가능태와 실재태와 관련된다. 물질과 연장의 세계는 가능한 것이 구체화 즉 실재화되는 상황에 놓인다. 상변화(물이 얼음이되는 것, 혹은 수증기가 되는 것은 잠재태가 현실태가 되는 것이 아니라 가능태가 실재태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세계로서의 모나드는 그 무수한 계속적으로 생성되고 겹치는 주름의 상태에서 의 잠재태인 것이 하나의 파악. 하나의 선택, 하나의 사건들의 연쇄를 통하여 현실태가 된다. 현실태의 상황은 다른 현실태의 상황과 공존 불가능하다. 죄지은 아담과 죄 짖지않은 아담과는 공존 불가능하다. 사건 속성이 그러하다. 하나의 사건, 하나의 계열은 다른 계열, 다른 사건과 공존 불가능하다. 이 잠재태-현실태의 사건-영혼-모나드의 세계는 가능태-실재태의 신체, 틀, 물질의 세계와 구별된다. 이 주름으로 파악되는 세계에 대한 인식은 르네상스 이후 마니에리즘을 통하여 형성된 바로크의 핵심적인 신과 우주의 개념이며 라이프니츠는 모나드를 통하여 영혼과 실체로서 신을 사유한다. 라이프니츠는 ‘조화’의 개념을 바로크의 음악을 멜로디와 화음을 통하여 설명한다. “바로크의 집이 음악적이게 될 때: 위층은 조화로운 수직적인 모나드들, 이모나드가 각자 자신의 암실 안에서 생산하는 내부적 화음들, 이 화음들의 상응관계 또는 협주를 내포한다.; 아래층은 서로서로 스며들어 있는 무한히 많은 수평적 멜로디 선율을 따라 연장되며, 이 선율에서 변주들이 장식됨과 동시에 감각적 연속성이 전개된다.”-이 귀절은 잘 이해 되지 않는 대부분의 구절에 하나이지만 수평적 멜로디보다 수직적인 화음이 보다 높은 차원의 모나드 상태인 것 같고, 위층의 화음과 아래층의 멜로디가 조화된 상태 그리고 전개됨이 라이프니츠의 중요한 세계인식 중에 하나인 듯하다.- “라이프니츠의 모나드들은 두가지의 조건, 울타리(영역?)와 선별에 종속되어 있다. 한편으로는 모나드 들은 온 세계를 포함하고, 세계는 모나드 밖에서 실존하지 않는다. 다른 한편 이 세계는 수렴이라는 일차적인 선별을 상정하는데, 왜냐하면 이세계는 모나드에 의해 배제되는, 발산하는 다른 가능세계로부터 구분되기 때문이다.” 들뢰즈는 생성되어가는 주름으로 구성된 온 세계를 포함하고 있는 라이프니츠의 모나드인 영혼에 대한 독해를 통해서 바로크의 이중적인 세계관(내용으로서의 천과 표현으로서의 주름)을 이해하고 모나톨로지monadologie를 자신의 유목민주의 즉 노마톨로지nomadologie로 변형한다.(이중화한다doubler) “음악은 여전히 집이지만, 바뀐 것은 집의 조직화 그리고 그것의 본성이다. 더 이상 화음이 우리의 세계 혹은 우리의 텍스트를 표현하지는 않지만, 우리는 여전히 라이프니츠적이다. 우리는 새로운 포장의 벙식처럼 새로운 접기의 방식을 발견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라이프니츠적이다. 중요한 것은 언제나 접기, 펼치디, 다시 접기이므로.”라는 말로 글을 맺는다. 건축에 관련될 수 있을 것 같은 어떤 단상. “….. 문제 자체가 조건들을 변화시킨 것이다. : 새로운 바로크, 레오-라이프니츠주의. 도시에 대한 시선점의 같은 구성은 계속해서 전개된다. 하지만 더 이상 같은 시선점도, 같은 도시도 아니며 형태도 평면도 공간상에서 운동한다.” 음악, 미술, 연극, 영화 등등 모든 예술은 감상자의 위치를 고정시키고 그런 가정 하에 작업한다. 심지어 조각도 비교적 그런 편이다. 물론 최근에 대지 예술들은 이동을 통해서만 감상 가능한 것들도 있지만 말이다. 건축은 시간적인 이동, 건축물이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시선점인 감상자가 이동하여 영화의 카메라 같은 감상라인을 형성한다. 이 공간성 즉 시간성을 전재로 한 작업이 건축의 특성이며 이것은 응결이 아니라 펼침이고, 건축가는 구체적 형태 자체가 아니라 펼쳐지고 지속되고 변화하는 시선점의 이동(방향, 깊이, 각도, 이동과 빛과 소리와 그림자 등의 환경적인 변화를 포함한)을 고려하고 그것을 핵심으로 삼아야 한다. 어째든 다시 읽을 것을 결심하게 만드는 책들이 있다. 너무 어려워서 초반에는 너무 고통스러웠지만 후반으로 갈수록 조금은 접어두는 부분도 생기고 읽고 나서는 사는 태도에 대한 어떤 반성을 생각하게 하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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