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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0 장 건축에서 이야기 구조
시간과 공간은 물리학적 연구의 결과로 연결, 관계된 것으로 설명될 수 있다고 주장되고 있다.
민코프스키와 아인쉬타인의 시공간의 차원개념 - 4차원 시공 연속체 - 이 그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일반 감각은 그것은 여전히 다르게 느끼고 있다.
공간은 무한이 연장되는 것 혹은 연속되는 것, 그러한 성질일 수 있고, 시간은 지금을 기점으로 과거와 미래로 선형적으로 연속, 연장되어 있는 것처럼 느낀다. 많은 물리학, 철학의 연구는 그러한 상식의 이해와 다른 주장도 하고 있다.
상식적이고 평균적 시간 공간에 대한 이해에서 시작한다.
회화는 평면적인 시각예술, 그리고 조각은 입체적인 3차원 공간예술로 알려져 있다. 그렇지만 예술론 혹은 예술철학을 하는 당대의 많은 연구가, 이론가 들은 그러한 공간적인 예술 특히 현대예술은 시간성을 다루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 시간성은 혹은 초시간성, 혹은 시간을 넘어선 것고 어렵게 설명되면서 그런 이유로 시간적 예술임이 주장된다.
일반적으로 시간적 예술은 -시와 음악이 그를 대표하는 것일 수 있다- 감상의 과정에서 시간적 경과를 필요로 하고 시간적 경과를 이용하여 무엇인가 드러내고, 전달되고, 감상된다.
순간적으로 포착된 직관 혹은 이해가 다음 순간에 읽혀진 또 다른 것에 영향을 주고 연속 혹은 단속의 것들이 연쇄를 일으킨다.
다시 말하면 시간적 연쇄를 이용하여 예술적 정서를 전달하거나 시간의 연쇄 자체를 탐구의 대상으로 한다.
그런데 시각예술 또는 공간예술의 회화와 조각은 어떠한가.
회화는 이면이 없다. 평면적 정면이 그 자체이다. 그렇다고 회화가 한 순간에, 일시에, 단일한 직관으로 감상될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그것이 물상을 그리든, 사건을 그리든, 색 자체를 드러내든, 물질성를 드러내든 시간으로부터 잘려내진 공간 자체의 것은 아니다.
그것은 그러한 공간적 예술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인식을 통해서 무언가를 가까이 할 때 이미 시간의 독특한 성질에 휘말려들기 때문이다.
인식능력의 문제만도 물론 아니다. 한꺼번에 받아들일 수 없는 감각에 의존하는 인식의 정보 전달, 처리능력의 한계 만의 문제는 아니다. 그것 자체, 시간적 문제 자체가 우리의 존재, 상황, 개념, 사건, 물상의 모든 것에 걸려있기 때문이다.
물론 인간의 인식, 경험의 근거로서 시간, 공간의 선험성도 중요하다. 인간은 그러한 인식의 틀 혹은 존재의 형식으로서 시간 공간의 문제를 긍극적으로 질문 할 수 있는 존재이다.
그러한 질문의 틀에서 건축에서의 시간의 문제, 혹은 건축적 시간성의 문제를 생각한다.
그 필요성과 효용성의 문제가 제기되는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건축적 시간 혹은 시간성을 질문 할 수 있지 않을까.
1. 건축은 시간의 변화를 표현하고 있는가
건축은 무언가를 만드는 작업이다. 만드는 것은 작업하는 사람의 관심과 필요와 연관을 전제로 한다. 다른 것을 기피하고 싶다거나 무관심의 이유도 포함해서 자신의 결심과 행위에 의해서 가능하게 된다. 다른 것을 할 수도 있고 만들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대상-나중에 결심하여 만든 대상- 과의 관계에서라면 앞의 이야기처럼 여전히 그 관계를 이야기 할 수 있다.
건축에서 만들어진 것이 공간적 차원을 갖는다. 공간적 차원, 우리가 3차원이라고 말하는 것은 배면이 있다. 배면은 돌려서 보거나 그곳을 가서 보지 않으면 볼 수 없는 곳 혹은 것이다.
또한 건축은 규모에 있어서 손에 올려 놓고 볼 수 있는 장난감과 달리 어떤 크기를 전제로 한다.
크기는 시선과 거리의 문제이고 시선과 거리는 빛의 현상과 개념을 필요로 한다.
3차원 자체가 빛의 문제가 된다.
빛은 감각과 인식과 개념의 근본이다. 건축은 행위와 행위가 담기는 공간을 대상으로 한다. 행위는 빛과는 다른 차원이다. 공간의 빛과 동일한 차원이 된다.
건축은 행위와 빛의 문제이다.
빛은 보인다는 감각의 문제를 넘어서 인식의 근원이 된다.
거리, 깊이, 중첩, 관입 등 공간적인 모든 논의는 빛과 연관된 이해를 전제로 한다.
건축은 보는 것이 아니라 읽은 것이다. 읽는 것은 보는 것과 달리 연상을 통한 종합의 과정이 있다. 다르게 표현하면 연속적으로 보는 것이다.
이미지의 연쇄가 일어난다.
소설과 영화와의 유사성, 즉 시간적인 문제의 고려가 이러한 건축에서의 읽기의 과정의 중요성 때문이다. 물론 읽는 것은 보는 과정이 필수적이다. 그것이 이미지의 연쇄를 통하여 이야기의 구조가 되는 것은 기호작용의 도움이 있기 때문이다.
건축이 개념을 다루는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기호작용과의 연관된 내용이 있기 때문이며 건축에서의 기호는 소통과 예술의 모든 영역에서 가장 추상적인 영역에 있다. 추상적 기호로 만들어진 분양이다.
공간성은 빛에서 가능한 것이고 그 것은 규모 면에서 혹은 3차원의 성격 때문에 시간적인 연쇄와 연장의 도움을 필요로 하고 보는 것이 아니라 읽음의 문제, 이미지의 연쇄, 즉 지속 또는 단절의 문제가 된다.
건축과 영화는 여러 면에서 동질적이다. 건축은 조각과 영화와 중간 쯤의 소통 혹은 예술이 된다.
그래서 기호와 시간과 공간은 건축 안에서 통합된다.
결과적으로 건축의 공간적의 연쇄는 본질로서 시간성을 드러내고 시간성을 그 대상으로 한다. 본질과 대상이 하나인 것은 인간의 관심의 특성이다.
가능성(가능태)과 있슴(현재태)이 동시에 있다. 즉 건축의 공간적인 작업은 실존적이다. 공간은 만들어지는 것이고 비우는 것이다. 시간의 또 다른 속성이 공간의 작업인 건축을 통해서 드러난다. 비우는 것과 만드는 것, 과거의 것인 물질, 물상, 질량과 비인 것, 미래의 것인 공간이 하나의 소통 혹은 예술을 만든다.
물질은 이미 있는 것이다. 공간은 아직 없는 것이다. 물질은 현상이다. 공간은 가능성이다. 물질과 공간은 과거와 미래의 시간성을 드러낸다.
파르메니데스는 이미 건축을 사유한 것이다. 건축의 물질과 공간, 존재와 비존재. 연장과 시간의 문제를 말이다.
2. 이야기의 구조
시나리오적 연상을 통하여 건축적 작업이 가능한가 혹은 건축적인 작업에서 시나리오적 작업이 유용한가라는 생각을 해본다. 건축은 공간의 연쇄 혹은 다른 공간의 성질을 결합시킨다. 시나리오에는 인물과 사건이 있다. 그들은 행위를 하고 행위는 어떤 공간에 담긴다. 행위는 연속적이다. 사건도 시간적 무대를 필요로 한다. 그리고 그것은 공간의 변화를 통해서 이야기로 만들어진다. 시간을 드러내는 구조이다.
건축은 고정된 인물과 사건을 구체화하지 않는다. 구체적인 것을 만들면서 모든 것에 대해 열려진 장소를 만든다. 그 안에 인물이 사건으로 참여한다. 그 글은 바라보고, 걷고, 이야기하고, 절망하고, 웃고, 일한다. 행위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기에 연속의 구조를 가지게 된다. 행위와 공간과 막힘과 열림, 건너감은 한데 뒤섞여서 범벅이 된다. 물질서해지고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은 전략과 기획은 사실 모든 것이 고려된 것이다.
고려된 것이 아니면 가능하지 않다. 우연도 그러한 고려에 한가지로 참여한다. 우연은 진정한 의미에 우연이 아니다.
영화에서의 배경으로서의 장소와 건축의 설계로서의 장소는 본질적으로 동일한 것이다.
감독은 이미 만들어져 있는 배경들, 현실의 장소를 선택적으로 그리고 의미 부여하여 새로운 성격으로 재생산 한다. 이미지의 생성이다. 생성의 재료가 반듯이 추상적이거나 무형의 것일 필요는 없다. 있는 것의 새로운 선택, 배열, 배치, 의미부여가 생성인 것이다. 영화의 배경과 장소는 바로 그런 것이다. 영화에서 미장센(mis-en-scene, putting on stage/원래 연극 용어로 ‘무대 위에 배치하기’로 세트, 소품, 조명, 의상 분장, 배우 등 희곡에 잇는 것을 이미지화시킨 것, 영화로 확장되면서 촬영하기 위한 로케이션과 세트와 조명과 분장 소품 등 감독이 설정해 놓은 상황을 말한다. 미장샷(mise-en-shot)의 의미까지 확장해서 이해되기도 하는데 좁은 의미의 미장센에다가 카메라의 위치와 움직임, 샷의 스케일, 하나의 샷을 찍는 시간등이 포함되기도 한다.필름에 옮겨진 사건 혹은 피사체가 미장센이라면, 옮기는 방식은 미장샷이다)은 배경과 장소에 이야기적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행위이다.
그것은 배경과 장소를 의미화하여 기호화한다. 기호화를 통해서 언어적 작용이 시작되고 바로 그것이 공간을 시간화하는 것, 즉 이야기의 시작이다. 즉 신화의 문제가 바로 그 것이다.
건축의 공간은 그러한 기호와 생성, 언어의 문제를 본질적으로 드러낸다. 건축의 작업은 자연 공간에 도구적 의미 부여를 통하여 오히려 추상적 가능성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과정과 감상이 이야기의 구조를 갖는다. 그것이 우리의 관심으로 드러날 수 있는 한에서 말이다.
도구적인 의미부여는 일반적으로 본질과 추상성을 빼앗아 버린다. 하지만 건축에서는 그 반대의 현상이 일어난다. 기능에 의해, 사회적인 욕구에 의해 만들어진 건축의 내용-공간, 기능, 조형, 재료는 그 일반적인 의미를 넘어서 본질의 대상으로 변한다.
건축의 공간은 지연 공간과 달리 벽에 의해서 구획되면서 건축적인 사유의 대상이 된다. 건축의 기능은 행위를 담는 초월적 지위로 인해서 그 결합과 배치의 문제를 통하여 본질적인 연구 대상이 된다. 주택의 문제, 교회, 병원, 호텔 등 모든 건축에 있어서 평면의 문제는 공간의 기능적 결합의 무한 가능을 보여 주었으며 그 자체가 추상적 이론적 연구 대상은 물론 용도가 아닌 기능의 본질인 문제를 드러내준다.
이러한 공간 혹은 기능의 문제는 복잡한 단면의 문제와 더불어 복잡합의 연쇄인 복잡성, 즉 시간적의 고려를 필요로 한다. 단면은 중첩되고 배면과 결합의 문제를 드러낸다.
이런 모든 문제가 이야기의 구조로서 연구될 수 있다.
사건의 연쇄, 이미지의 연쇄, 결국 배치의 연쇄의 구조를 가진다.
3. 힘의 발견
건축을 이야기의 생각하는 시각은 작용(혹은 반작용)에 대한 고려가 깔려있다.
작용 반작용은 물리학적으로 힘과 반응의 문제이다. 고전물리학의 가속도의 문제이다. 다르게 표현하면 영향력의 문제이다. 영향력은 아직 드러나지 않은 장에 대한 배경이다.
드러나지 않았지만 존재하는 것으로서의 힘이 있다. 잠재적인 힘이다. 건축을 포함한 모든 소통과 예술은 그 잠재된 힘의 영향력을 핵심으로 한다. 현실적인 힘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또 그 안에 숨겨진 그러면서도 여전히 적용하는 잠재된 힘을 느끼고 구성한다. 힘은 드러나거나 영향력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일종의 작용이다. 시간이 선후가 있고 그것의 전도와 단절을 통하여 힘을 배분한다. 감정, 인식, 이미지 등 모두는 이러한 영향선 –시간의 선후에 따른 상호관계-의 문제이다.
특히 도형에서 힘은 쉽게 발견될 수 있다. 직선은 뻗으려 하고 혹은 멈추고 싶고, 바퀴는 구르고 싶고, 굴리고 싶고, 원은 순환하거나 영원히 정지해 있다. 현태 혹은 공간의 모서리는 보통 그러한 선으로 인식되거나 이해된다. 힘이 이미 잠재되어 있는 것이다.
선형만이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물질, 물성, 매스, 볼륨 등 모든 곳, 존재하는 모든 것은 힘을 내재하고 있다. 이 것은 다시 존재와 비존재의 문제가 된다.
인문적인 상황의 문든 것도 힘의 문제이다. 건축은 그러한 힘을 재배치하고 조절한다.
도시와 공간의 문제는 그래서 힘의 배치의 문제이기 때문에 동일한 이해의 수준을 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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