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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

니체와 철학 01

니체와 철학                부분요약

 

제일장 비극

 

1. 계보학의 개념

   가치와 평가/비판과 창조/계보학이란 단어의 의미

니체의 가장 일반적인 기획은 철학에 의미sens와 가치의 개념을 도입하는데 있다. 니체의 의미와 가치의 철학이 (진정한)비판(철학)이어야 한다. 가치 철학은 칸트와 달리(칸트는 가치의 관점에서 비판을 제기하지 못했다) 참된 비판의 실현이며, 전면적인 비판을 실현하는 방식, 철학을 <망치질>로 만드는 방식이다. 가치의 개념은 비판적critique전복을 함축하고 있다. 가치야 말로 '평가', 가치 자체가 파생하는 <평가의 관점>을 전제 한다. 따라서 그것들의 창조creation의 문제이다.

평가는 가치의 미분적(微分的) 요소에 의해서 정의된다. 이때 요소란 비판적인 동시에 창조적인 것이다. 그것들의 요소에 결부된 평가는 가치가 아니라 판단하고 평가하는 자들의 존재이자, 현존 양태인데, 그들이 미루어 판단하는 가치에 있어서 분명히 원리의 구실을 한다.

중요한 점은 고귀함과 저속함, 우아함과 비루함은 가치들이 아니라 가치들 자체의 가치가 파생하는 미분적 요소를 나타낸다는 것이다.

 

니체는 비판철학을 통하여 이중의 투쟁을한다. 하나가 칸트, 쇼펜하우어와 같은 <철학의 노동자들>인데 그들은 비판으로부터 가치들을 박탈하고, 현행가치들의 목록을 만들거나, 기존의 가치라는 이름 아래서 상황들을 비판하는데 만족한다. 다른 한편은 단순한 사실들, 소위 객관적인 사실로부터 가치를 이끌어 내면서 가치를 비판하거나 존중하는 자들, 즉 공리주의자들, <학자들>에도 반대한다. 이두 경우 철학은 그 자체 가치있는 것이거나, 모두에게 가치 있는 것이란 무관심한indifferent요소 속에서 허우적 거린다.

니체는 가치가 그것의 기원에 무관심하도록 방치하는 토대라는 고상한 개념에 반대한다. 또한 가치에 무관심한 기원을 상정하는 단순한 인과적 파생이나 평범한 시작의 개념에 반대한다. 니체는 계보학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 낸다.

계보학은 가치 그 자체가 파생되는 가치들의 미분적 요소를 의미한다. 계보학은 기원이나 탄생을 의미할 뿐 아니라 기원 속의 차이와 거리를 의미한다. 계보학은 기원 속에서 우아함과 저속함, 우아함과 비루함, 우아함과 몰락을 의미한다. 우아함과 비루함, 고귀함과 저속함 바로 이것이 계보학적이거나 비판적인 요소이다.

니체의 비판은 반작용이 아니라 작용이다. 비판은 원한이라는 반작용이 아니라 현존의 능동적 표현이며, 복수가 아니라 공격이며, 존재의 방식의 자연적 공격성이고, 그것 없이는 완전성이 불가능한 신성한 악의이다.    

 

2. 의미

   의미와 힘/복수주의/의미와 해석/<우월한 단계들만이 중요하다>

힘의 진정한 내용을 알지 못한다면 현상의 의미의 진정한 모습을 알 수 없다. 모든 철학은 (현상에 대한) 징후학이자 기호학이다. 니체는 현상과 의미의 상관 관계로 외관과 본질의 형이상학적 이원성을 대체하며, 또한 원인과 결과의 과학적인 관계도 대체한다.

사물의 역사는 그것을 독점하는 힘들의 연속이고 그것을 독점하기 위해서 투쟁하는 힘들의 공존이다. 역사는 의미의 변주인데, <다소 폭력적이고, 서로간에 다소 독립적인 예속화 현상들의 연속>이다. 그러므로 의미는 복합적인 개념이다. 즉 의미의 복수성, 성좌constellation, 연속들의 복합체, 도한 해석을 하나의 기술로 만드는 공존의 복합체가 존재한다.

니체는 본질적인 복수주의자이다. 복수주의는 구체적인 의식 속에서 자유의 유일한 보증이자, 폭력적 무신론의 유일한 원리이다. '신들은 죽었다. 하지만 자기만이 유일하다고 말하는 어떤 신의 이야기를 듣고서는 웃다 죽었다.' 신의 죽음은 그 의미가 다수인 하나의 사건이다.

모든 것을 힘으로 이해하는 것은 해석하기와 평가하기인 계량의 문제이고 철학의 섬세하지만 엄밀한 기술이며 복수주의적 해석이다. 그렇지만 처음에 생명은 단지 가능하기 위해서 물질을 모방해야 하는 것처럼 만약 어떤 힘이 그가 반대해서 투쟁하는 앞선 힘들의 얼굴을 우선 빌리지 않는다면 살아 남지 못할 것이다. 해석의 기술(의미와 계보학의 문제)은 가면을 꿰뚤어 보는 기술이고 누가 자신의 가면을 숨기며, 왜 그리고 어떤 목적에서 가면을 고쳐가며 보전하는 지를 밝히는 것이다.  

(니체의 의미의 문제는 그 해석에 있어서 복수주의적 내용을 가지고 그것이 계보학의 연구에 의해서 드러난다고 말한다.) 기원 내에서의 차이는 아마도 특별히 훈련된 눈, 멀리 보는 눈, 노인의 눈이나 계보학자의 눈으로만 찾아낼 수 있다.

<모든 것 중에서 우월한 단계들 만이 중요하다. 계보학으로 이해된 기원은 우월한 단계와 관련해서 결정될 수 있다.

 

3. 의지철학

   힘과 힘의 관계 : 의지/기원과 서열

계보학은 해석만 하는 것이 아니라 평가도 한다. 대상 자체는 힘force이고 한 힘의 표현이다. 그래서 대상(현상)과 그것을 독점하는 힘 사이에는 어느 정도 닮은 점까지 존재한다.

니체는 자연철학에서의 원자론을 물질적 원인 혹은 기초단위가 아니라 힘에 속해있는 복수적인 성질과 거리(영향력)을 부여하기 위한 시도라고 생각한다. (마르크스의 예, 데카르트의 기계론에 대립한 라이프니츠의 원자-힘이론의 예) 즉 원자는 힘으로 대체된다. 즉 원자론은 역동론의 가면일 것이다.

니체에게서 힘의 개념은 다른 힘과 관계 맺고 있는 어떤 힘의 개념이다. 이 측면에서 힘은 의지라고 불리운다. 의지(권력의지)는 힘의 미분적(dy/dx) 요소이다. 그로부터 의지 철학이라는 새로운 입장이 생겨난다. 의지에 관한 참된 문제는 명령하는 의지와 복종하는 의지의 관계 속에 있다. 의지는 의지에 작용하고 복합적이며, 상하관계 즉 서열(하이어라키hierarchie)가 중요하다. 원자론이 힘의 그릇된 해석인 것처럼 이기주의도 의지의 그릇된 해석이다. 기원은 기원 석에서의 차이이고 기원속에서의 차이는 서열 즉 복종시키는 의지와 복종하는 의지의 관계이다. 서열은 원초적인 사실이고 차이와 기원의 정체성이다. 어떤 것의 의미는 그것과 그것을 독점하는 힘의 관계이고 어떤 것의 가치는 복합적인 현상인 한에서 사물속에 표현되어 있는 힘들의 서열이다.

 

4. 변증법에 반대해서

   차이와 모순/노예가 변증법에 미치는 영향

니체는 초인surhomme의 개념을 통해서 인간의 헤겔적인 변증법에 반대하고 니체의 가치 전환 transvaluation은 소유의 변증법이나 소위 제거의 변증법에 반대한다. 반 헤겔주의가 공격의 날처럼 니체 저작을 가로지르고 있다.

다른 힘들과 관계 속에서 스스로 복종하는 힘은 다른 힘이나 자신이 아닌 바를 부정하지 않으며, 자신의 고유한 차이를 긍정하고 이 차이를 향유한다. 부정(변증법의 주된 원리인)은 힘이 그로부터 자신의 활동을 이끌어 내는 것으로서의 본질에 있는 것이 아니다.

니체는 부정, 대립, 모순의 사변적 요소를 긍정의 대상이자 향유의 대상인 차이difference라는 실천적 요소로 대체한다. <자신이 다르다는 것울 인지하는 기쁨>, 차이의 향유. 바로 거기에서 경험주의는 변증법의 무거운 개념을, 특히 변증법 주의자가 말하는 부정의 노동을 바로 공격적이며 경쾌한 새로운 개념적 요소로 대체한다. 변증법은 노동이고 경험주의는 향유이다. 니체의 <>는 변증법의 <아니오>, 긍정은 변증법의 부정과, 차이는 변증법의 모순과, 기쁨과 향유는 변적법적 노동과, 가벼움과 춤은 변증법의 무거움과 기분좋은 무책임성은 변증법적 책임성과 대립한다.

차이의 경험적인 감정, 간단히 말해서 서열은 모숨의 모든 사유보다 더 효과적이고 심오한 개념의 본질적인 동력이다.

변증법에 있어서 니체의 경우와 달리 권력puissance이 거기서 권력의지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권력의 표상으로, 우월성의 표상으로서, <어떠 이>에 의한 <다른 이>의 우월성에 대한 재인식으로 이해된다. 헤겔의 노예의 변증법에서 우리에게 제안하는 주인의 초상은 (스스로 긍정주의적이지 못하고) 기껏해야 출세한 노예에 머문다.                

 

5. 비극의 문제

   비극의 변증법적 입장과 <비극의 기원>/비극의 기원에 대한 세 주장

니체의 비극적 세계관은 (유럽의 두가지 사유체게, 가치체계인) 변증법적인 것과 기독교적적인 두가지 입장들과 대립시킨다. 좀 더 세분하면 니체의 비극적 세계관은 세가지 입장에 의해서 죽임을 당한다. 처음이 소크라테스의 변증술<변증법>인데 그것은 에우리피데스적 죽음(그의 영웅들은 신들에 의한 운명의 노리개가 아니라 그 자신의 격렬한 정념에 희생된다)이다. 두번째로 기독교에 의해 죽는다. 세번째로 근대의 변증법과 바그너의 화신으로 변화된 공격들 아래서 죽는다.   

니체의 비극관은비극의 기원(탄생)’이라는 저서에서는 변증법주의적인 모습과 그 발전인 쇼펜하우의 의 모습이 나타난다.

‘비극의 기원은 따라가 보면

1) 원초적 모순은 삶과 반대해서 비판한다.(변증법적 부정) 삶은 고통과 모순에 의해서 대속되어 정당화 될 필요가 있다. ‘비극의 기원은 기독교적 법주들(정당화, 속죄, 화해)의 보호 아래서 전개 된다.

2) 모순은 디오니소스와 아폴론적 대립 속에 드러난다. 그러나 모순의 항들로서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모순을 해소하는 반테제적인 두 방식으로서 서로 대립한다. 반테제는 해소 되어야만하고 <통일로 변화되어야만 한다.

3) 비극은 그런 화해이고 디오니소스에 의해서 지배되는 경탄할 만한 일시적 동맹이다. 비극의 유일한 인물은 <번민하는 찬양받는 신>으로서 디오니소스이다. 따라서 비극의 유일한 주제는 디오니소스의 고통, 개별화의 교통, 원초적인 존재의 쾌락 속에서 소멸된다. 

한편 아폴론적인 토대는 비극 속에 있고 아폴론은 비극을 드라마로 발전시키고 비극을 드라마 속에서 표현한다. <비극은 아폴론적 이미지의 세상을 자신 밖으로 투영시키면서 스스로 펼쳐니가는 디오니소스적인 합창단이다.> 그것은 아폴론적 세계나 형태 아래서의 디오니소스의 객관하인 것이다.

 

6. 니체의 발전

   비극의 기원속에서의 새로운 요소들/소크라테스/기독교

니체는 삶을 위해서는 삶이 긍정되어야지 정당화되거나, 대속되어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아직 쇼펜하우어와 바그너의 영향 아래서는 개별자는 인격 보다 우월한 비인격적인 존재로 변화되어야만 한다.앞선자는 후자의 특권을 자기 것으로 주장한다. 두번째 지오니스스가 처음의 디오니 소스보다 우세하지 못하도록 방해한다.

그러나 니체가 저작활동의 마지막 무렵에서 비극의 기원에 대해서 탐구할 때(이 사람을 보라) 변증법과 쇼펜하우어를 넘어서는 혁신적인 두가지를 깨닫는다. 하나는 삶의 우월한 해결이나 그것의 정당화를 대신하는 삶의 긍정이다. 다른 하나는 비극의 기원의 참된 대립은 디오니소스와 아폴론간의 너무도 변증법적인 대립이 아니라 디오니소스와 소크라테스간의 보다 심각한 대립이다.

소크라테스에게서 충동은 비판적인 것이 되고, 의식은 창조적인 것이 된다. 소크라테스는 퇴락의 천재이다. 그는 관념을 삶과 대립시키고, 삶을 관념에 의해서 판단하며, 삶을 관념에 의해서 판단되고 정당화되고 대속되는 것으로 놓는다.

그렇지만 참된 대립은 (변증법적인 과정을 벗어나기 위해서) 스스로 변화해야 할 것이고, 전형적인 영웅으로서의 소크라테스에 만족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래서 비극적 인간은 순수 긍정 속에서 자신의 고유한 요소를 발견함과 동시에 참으로, 결정적으로 본질적으로 부정의 기획에 앞장서는 자인 자신의 보다 지독한 적을 발견해야만 한다.

니체는 이 프로그램을 엄격히 현실화 시킨다. 디오니소스와 아폴론의 반테제는 보다 신비로운 디오니소스와 아리아드네의 보완성으로 대체된다. 그 까닭은 삶을 긍정하는 것이 문제일 때 한명의 여인, 약혼녀가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디오니소스와 소크라테스의 대립은 참된 대립으로 대체된다.

기독교와의 대립이다.    

 

7. 디오니소스와 예수

   삶을 위해서 또는 반대해서/변증법적 사고의 기독교적 특징/변증법

디오니소스와 예수는 순교자이며 열정도 같다. 동일한 현상인 반면 반대의 방향이다.

기독교에 있어서 삶 속에 고통이 있다는 것은 삶은 정의롭지 않고 그 본질에 있어서 부정의한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고통에 의해서 본질적인 부정의를 갚아나가야 한다. 그것이 고통을 느끼고 있기 때문에 죄인이다. 고통에 의해서 구원받아야 함을 의미 한다. 이것이 <양심의 가책> 또는 <고통의 내재화>라고 니체가 명명한 것이다. 사랑 아래서 얼마나 많은 증오가 있는지. 그것은 맹금이 (유혹에 빠지고, 팔다리를 잃고 죽어가는) 어린 양을 사랑하듯 삶을 사랑한다.

디오니소스에게서 삶은 정당화될 필요가 없다. 그에게 있어서 삶은 본질적으로 정의로운 그러한 신이다. 그것이 고통을 내재화할 때, 그것을 해소하지않으며, 자신의 외재성 속에서 그것을 긍정한다.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디오니소스와 예수의 대립이 정확히 삶의 긍정(그것의 극단적 평가 절상)과 삶의 부정(그것의 극단적 평가절하)으로 전개된다.

디오니소스적 가치전환transvaluation 은 기독교의 화체化體transsubstantiation 와 대립한다. 디오니소스의 사지가 찟긴 죽음은 다수의 긍정의 직접적인 상징이고, 예수의 십자가, 십자가의 기호는 모순과 그것의 해결의 이미지이며, 부정적 노동에 종속된 삶이다.

(자라투스트라의) 긍정은 소리친다. 발전되고 해소되고 제거된 모든 모순보다 더 고귀한 것은 가치전환이다. 디오니소스와 예수, 자라투스트라와 예수의 대립은 변증법적인 대립이 아니라 변증법 자체와 대립이다.  

 

8. 비극의 본질

   비극과 기쁨/드라마에서 영웅까지/현존의 의미와 정의

다수의 긍정과 복수적 긍정이 비극의 본질이다. 비극이란 기쁨의 미적 형태를 가리키는 것이지, 의학적인 처방을 가리키는 것도, 고통, 공포 또는 연민의 도덕적 해결을 가리키는 것도 아니다.

디오니소스는 아리아드네를 하늘로 인도 한다. 아리아드네의 왕관의 보석들은 별이다. 아리아드네의 비밀, 그 유명한 주사위 던지기에서 나온 솟어나온 성좌. 주사위를 던지는 자는 바로 디오니소스이다. 그는 춤추고 변신하고 무수한 기쁨들의 신<폴리게츠polygethes>라 불린다. 

 

9. 현존의 문제

   죄지은 현존과 그리스인들/아낙시만드로스/과실 있는 기독교/무책임성의 가치

그리스와 기독교 모두 사람들은 현존의 부정의를 입증하기 위한 수단임과 동시에 그것에 우월하고 신성한 정당회를 찾아주기 위한 수단으로서 고통을 이용했다. (현존은 고통스러워하기 때문에 죄인이지만, 고통스러워하기 때문에 속죄되고 대속된다.)

아낙시만드로스는 현존의 그런 입장을 완벽하게 표현해 낸 철학자이다. 그는 <존재들은 시간의 질서에 따라서 자신들의 부정의의 고통과 사죄를 서로 갚는다>라고 말했다. 그 의미는

1) 생성은 부정의(아디키아addikia)이고 현존에 도래하는 다수의 것은 부정의의 총합이다.

2) 그것들은 서로 투쟁하고 자신들의 부정의를 프토라phtora에 의해서 서로에 속죄한다.

3) 그것들 모두는 원초적 존재(아페이론Apeiron)에서 파생하고 자신들을 파괴하면서, 연원히 자신의 부정의를 속죄하는 죄가 있는 생성, 다수성, 생산 속으로 전락힌다. [테오디세] 

쇼펜하우어는 일종의 현대의 아낙시만드로스이다.

그리스의 죄(거인족이나 프로메테우스의 죄)와 기독교의 죄(원죄)는 그들의 현존에 대한 이해만큼 다르다. 아리아인들(그리스인들)에게서 죄는 남성적이고 유태인에게서 죄는 여성적이다. (디오니소스의 약혼녀인) 아리아드네는 니체의 최초의 비밀이고 여성의 최초의 힘이며 영혼이고 디오니소스적 긍정에서 분리할 수 없는 약혼녀이다.

기독교는 행복과 덕을 주장하면서 철학을 노파로 만들어버리고, 비난과 원한ressentiment을 현존에 대한 경건한 해석으로 만든다. 인간이 사유하자마자 사믈들 속에 복수의 세균을 집어 넣었다.

 

무책임성은 니체의 가장 우아하고 아름다운 비밀이다. <나는 완전한 무책임성이 쟁취되기를 원했고 칭찬과 비난, 현재와 과거에서 나를 독립시키기를 원했다>

 

그리스인들은 죄를 지은 현존, <지나친> 현존의 잘못의 책임이         ``````````        `        신들에게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죄악의 기독교적 해석과 큰 차이이다. (그렇지만 근본적으로는) 신이 인간에게 불러일으킨 광기의 책임을 자신에게 전가시키는 것이나 혹은 십자가에 자신을 매달게 했던 신의 광기에 대한 책임이 인간에게 있다는 것은 본질적인 차이가 없다.

문제는 유죄인 현존이 책임이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고, 현존이 유죄냐 무죄냐 이다. 그때, 디오니소스는 자신의 다수의 진리를 발견 했다. 다시 말해서 결백, 복수성의 결백, 생성의 결백과 존재하는 것의 모든 것의 결백이다.    

 

10. 현존과 결백

   결백과 복수주의/헤라클레이토스/생성과 생성의 존재, 다수와 다수의 하나/영원회귀 또는 놀이

헤라클레이토스는 비극적 사색가이다. 그에게서 삶은 근본적으로 결백하고 정의롭다. 그는 놀이의 충동에서부터 현존을 이해하고, 현존을 도덕적 혹은 종교적 현상이 아니라 미적 현상으로 만든다. 

그래서 니체는 자신을 쇼펜하우어에 대립시키듯 헤라클레이토스를 아낙시만드로스에 대립시킨다.

생성 너머에 존재는 없고 다수너머에 하나는 없고, 다수나 생성은 외관이나 허상이 아니다. 외관 너머에 있는 본질처럼 영원한 다수의 실재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유일한 것은 탄생과 파괴 속에서 긍정되어야 한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생성 속에서 부정적인 어떤 것을 보지 못했다. 그는 생성과 생성의 존재의 이중의 긍정, 즉 존재의 정당화라는 것의 정반대를 보았다.

되돌아 오기는 생성되는 것의 존재이다. 생성의 법칙, 정의, 그리고 존재로서의 영원회귀인 것이다.

그로부터 현존은 책임질 것도, 유죄인 아무 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다수와 하나, 생성과 존재의 상관관계는 하나의 놀이를 형성한다.    

헤라클레이토스는 히브리스hybris-무모한 행동, 폭력, 무례, 거만-를 놀이의 본능과 대비시킨다. <그것은(아마도 현존) 유죄의 오만이 아니고, 새로운 세계를 백일하에 불러들이는, 지속적으로 깨어나는 놀이의 본능이다.> 테오디세theodicee(+정의라이프니츠)가 아니라, 코스모디세(우주+정의들뢰즈)이며 속죄해야할 부정의不正義 총합니 아니라, 이 세계의 법칙으로서의 정의이고, 히브리스가 아니라 놀이이고 결백이다. <히브리스라는 위험한 단어는 모든 헤라클레이토스주의자의 시금석이다. 바로 거기서 그가 자신의 스승을 이해했는지 오해했는지를 드러내 보일 수 있다.>

 

11. 주사위 던지기

   두시간/우연과 필연;이중의 긍정 / 주사위 던지기와 기회계산 간의 대립

놀이에는 (우연의) 던지는 시간과 (필연의) 떨어지는 주사위 놀이의 두 시간이 있다. <, 내 위에 있는 하늘, 순수하고 고귀한 하늘! 지금은 애게 있어서 너의 순수성른 영원한 거미도, 이성의 거미줄도 존재하지 않는다. 너는 신성한 우연들이 춤추는 바닥들이며, 너는 주사위들과 놀이하는 신들을 위한 신성한 탁자니라…….> 니체는 놀이하는 자와 예술가의 두시간이기도 한 삶의 두 탁자를 강조한다. 사람들이 한번 던지는 주사위들은 우연의 긍정이고, 그것들이 떨어지면서 형성되는 조합은 필연의 긍정이다. 존재가 생성에 의해서 긍정되는 것과 정확히 같은 의미로, 필연은 우연에 의하여 긍정되며, 하나는 다수에 의해서 긍정된다. 니체는 우연을 긍정으로 만든다.

니체는 인과성과 목적성, 확률성과 목적성의 쌍, 이항들의 대립과 종합, 이항들의 거미줄을 우연과 필연의 디오니소스적 상관 관계, 우연과 운명의 디오니소스적 쌍으로 대체한다.

여러 번 되풀이되는 확률이 아니라 단 한번의 모든 우연이며, 욕망되고, 의욕되고, 소망된 최종 종합이 아니라, 운명적인 조합, 즉 가장 사랑하는 운명적인 조합, 다시 말하자면 아모르 파티amor fati. 주사위 던지기 횟수에 의한 어떤 조합으로의 회귀가 아니라 운명적으로 획득된 수의 본성에 의한 주사위 던지기의 반복이다.                                                                                                                                                                                                

12. 영원회귀를 위한 결론들

   우연과 가열, 혼돈과 순환적 운동

영원회귀 속에서 운명은 또한 우연의 <환영(반김,인사)>이다.

자신이 해당되기를 열망하는 우연의 많은 조각들이 있다. 그것들은 지신의 확률성에 근거하며 각각은 여러 번의 주사위 던지기에 놀이꾼을 간청하고, 여러 번의 주사위 던지기로 되돌아온, 그리고 단순한 확률이 된 우연의 조각들은 주인처럼 말하고 싶은 노예들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일반의 우연에 대해서 자라투스투라는 반대한다. 그는 그 모든 조각들을 다시 모으기 위해서 또 가능하지만, 운명적이고 필연적인 수를 긍정하기 위해서, 단 한번에 모든 우연을 글정해야만 한다. (따라서 자기 손안에서 주사위들을 데우는 놀이꾼처럼 그것을 끓이고 익히도록 해야한다.) 그 때만이 우연은 자신의 친구를 만나러 오고 그 친구가 다시 오도록 하는 친구이고 운명 자체가 연원회귀 자체에게 보장되는 운명의 친구이다.

헤라클레이토스만이 혼돈과 순환이 전혀 대립하고 있지 않음을 꿰뚫어보았다. <최후의 성격을 띤 모든 활동을 배제하는 보편적 혼돈은 순환의 관념과 모순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관념은 비합리적인 필연성일 따름이기 때문이다>라고권력의지라는 책에서 니체는 말한다.

니체는 헤라클레이토스를 제외하고는 서구의 정신사를 통하여 그들의 <생성 속의 법칙의 현전과 필연속의 놀이의 현전>을 보지 못했다.

 

13. 니체의 상징주의

   대지, , /경구와 시의 중요성

주사위가 던져졌을 때, 탁자는 요동치고 갈라진다. 그것은 단 한번에 모든 것을 긍정할 수 있는 불의 힘과 같다. 불은 놀이하는 요소이고, 대립자를 가지지 않은 변신의 요소이다.

니체가 자라투스투라라는 인물을 선택하게 된 세가지 이유가 있다.

첫번째 이유는 영원회귀의 예언자로서의 자라투스트라이다. 두번째이유는 예수와 대적하는 예수만한 소질을 가지고 논쟁적인 인물이다. 자라투스트라는 형이상학에 도덕을 도입하고, 도덕을 특별히 힘, 원인, 목적으로 만들었으며 도덕 그자체의 잘못인 신비화를 고발한다. 세번째 이유는 우연이라는 훌륭한 이유이다. 니체는 어떤 편지에서 말한다. <오늘, 나는 자라투스트라, 말하자면, 황금의 별이 의미하는 바를 통해 이해 했다. 그 우연이 나를 매혹한다.>

혼돈--성좌의 이미지들의 놀이는 디오니소스 신화의 모든 요소들을 결짐시키고 있다.

그러나 니체의 사유의 놀이는 자신의 이미지의 놀이를 다시 넘어 선다. 철학적으로 규정된 시와 경구는 복수주의적 니체의 사유형태이다. 어떤 존재, 어떤 횔동, 어떤 사물의 의미는 경구의 대상이다.   

금언maxime은 동기들을 벌견하려는 경향만을 가지고 있을 뿐 일반적으로 인간현상에 기초를 두고 있지 않아서 니체는 경구를 선택한다. 경구만이 의미를 말할 수 있고 경구는 해석과 해석의 기술이다. 마찬가지로 시는 가치들을 말하고 있기 때문에 평가의 기술이다. 그러나 가치와 의미는 너무나 복잡한 개념들이라서 시 자체는 (다시)평가되어야 하고 경구는 (다시)해석되어야 한다. 그것은 복수주의적인 관점에서 의미는 그것의 의미화가 파생되는 미분적 요소를 가리키며, 그것은 가치들이 그것들의 가치가 파생되는 미분적 요소를 가리키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항상 현재하지만 또한 시나 경구 속에 항상 함축되어 있고 감추어져 있는 그 요소는 의미와 가치의 두번째 차원이다. 해석과 평가 즉 사유의 우월한 능력은 되새김질하는 능력을 구성한다. 되새김질과 연원회귀, 즉 두개의 위장(stomach)이 필요하다. 경구의 회귀, 시의 순환이다. 모든 경구는 두번 읽혀져야만 한다.

주시위 던지기와 더불어 영원회귀의 해석은 시작되지만, 그것은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다. 그것이 되돌아옴과 동시에 주사위 던지기 자체를 도 해석해야만 한다.   

 

14. 니체와 말라르메

   닮은 점들/대립 : 소멸 또는 우연의 긍정?

니체와 말라르메는 유사점에도 불구하고 우연과 필연의 관계에 있어서 서로 다른 길을 간다.

말라르메는 항상 필연을 우연의 소멸로 간주했다. 말라르메는 주사위던지기를 우연과 필연이 두항이 대립하는 식으로, 후자가 전자를 부인하는 식으로, 전자가 후자를 실패하게 할 수 있다는 식으로 이해했다.

우연은 부인되어야 하는 현존과 같고, 필연은 순수 관념 혹은 영원한 본질의 특징과 같다. 말라르메에서 예술작품은 <정의롭지만> 그의 정의는 현존의 그것이 아니라 여전히 삶을 부인하고 그것의 싶패와 무능을 비난하는 정의이다. 말라르메는 주시위 던지기이다. 하지만 그것은 허무주의에 의해서 다시 파악되고, 가책과 원한의 관점들 속에서 해석된다.

긍정하고 찬양하는 맥락으로부터 분리되거나 결백과 우연의 긍정으로부터 분리된 주사위 던지기는 더 이상 아무 것도 아니며, 사람들이 거기서 우연과 필연을 대립시킬 때, 더 이상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된다.     

 

15. 비극적 사유

   허무주의에 저항하는 비극/긍정,기쁨 그리고 창조

니체는 원한, 가첵 등 허무주의가 심리학적 성향이 아니라 삶을 부정하고 현존을 비하하려는 (거대한) 시도라고 부른다. 그래서 그는 허무주의의 주요 형태들, 즉 원한, 가책, 금욕적 이상을 분석하고, 허무주의와 그것의 형태들 전부를 복수심이라고 부른다.

심리적 특징과 거리가 있는 복수심은 우리 심리학이 의존하고 있는 원리이다. 심리학에 속하는 것이 원한이 아니라, 바로 심리학은 부지불식간에 원한의 심리학 (자체)이다.

합리적인 사유로서의 사유의 범주들, 즉 동일성, 인과성, 목적성 자체는 원한의 힘인 그 힘의 해석을 가정한다. 우리는 복수의 충동이 심리학, 역사, 형이상학, 도덕이라고 불리는 것의 본질을 구성하고 있는 힘임을 이해해야 한다.

복수심은 우리 정신의 계보학적 요소이고, 우리 사유방식의 초월적 원리이다. 그로므로 허무주의와 복수심에 반대하는 니체의 투쟁은 형이상학의 전복, 인간사로서의 역사의 끝, 과학들의 변화를 의미할 것이다.

현존을 비난하지도 비하하지도 않을 인간이 여전히 인간일 것인가. 그를 인간으로 생각할 것인가? 그는 이미 인간과 다른 것, 거의 초인이 아닌가.

니체는 자기 철학의 목적을 허무주의와 그것의 형태들로부터 사유를 해방시키는 것이라고 소개 했다. 그런데 그것은 새로운 사유 방식, 사유가 의존하고 있는 원리 속에서의 전복, 계보학적 원리 자체의 재건, <전환transmutation>을 함축한다.

사람들은 니체에게서 비극적인 것 즉, 비극적인=즐거운 이라는 등식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것은 의욕=창조라는 의대한 등식을 놓는 다른 방식이다. 사람들은 비극이 다수의 순수 긍정, 힘의 명랑성인을 이해하지 못했다.

주사위던지기는 비극적이다. 너머지 모두는 허무주의, 변증법적이고 기독교적인 파토스, 비극의 희화화, 가책의 코메디이다.

 

16. 시금석

   니체와 다른 비극 철학자간의 차이/파스칼의 내기/허무주의와 원한의 문제의 중요성

파스칼, 키에르케고르,체스톱 등 (위대한?) 비극적 철학자 들이 있다. 그들은 도덕을 중지시키고 이성을 전복시켰다. 그러나 원한의 올가미에 사로집힌 그들은 그들의 힘을 여전히 금욕적인 이상 속에서 길어올렸다. 그들에게는 긍정의 의미, 외재화의 의미, 놀이의 결백성이 부족하다.

뛰어넘기는 춤추기가 아니며, 내기하기는 놀이하기가 아니다.

니체는 우리가 다른 놀이, 다른 놀이 방식을 발견할 수도 있었고, 인간적인-너무도 인간적인 현존의 두가지 양태에서 초인을 발견 했으며, 모든 우연을 조각 내고 그 한 조각이 주인처럼 말하도록 내버려 두는 대신 그것을 긍정할 수 있었고, 혼돈을 부정할 어떤 대상으로 삼는 대신 긍정의 대상으로 만들 수 있다고 말하고 싶어 한다. 

 

니체는 <히브리스란 모든 헤라클레이토스주의자의 시금석이다. 바로 거기서 그가 자신의 스승을 이해했는지 또는 오해했는지를 드러내보일 수 있다>라고 말한다. (마찬가지로) 원찬, 가책, 금욕적 이상, 허무주의는 모든 니체주의자의 심금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