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 부 일 반 예 술
<감각-지각과 감응>
들뢰즈는 2분법 혹은 2항대립 보다는 3분법을 더 즐기는 것 같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마지막 공저인 ‘철학이란 무엇인가’에서 철학과 과학과 예술을 비교하여 분석한다. 과학은 기능 혹은 지시로서 현실을 함수관계로 해석하는 것이다. 철학은 개념을 창안하는 것이고 내재성의 구도를 정초하는 것이다. 철학의 내재성의 구도는 잠재태와 순수사건의 구도이다. 예술은 감각의 이미지를 창조하는 것이고 그것은 구성의 구도이다. 예술의 구성의 구도는 가능태와 감각의 구도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예술작품을 “감각의 블록 즉 지각과 감응의 복합체라고 주장한다. 감각은 지각과 감응의 두가지 구성요소로 분리된다. 그러나 지각은 지각작용이 아니고 감응은 변양(변용affections)이 아니다. 한 개인의 지각작용 이전의 그 경험에 앞선 사람들의 상태에 독립적인 지각! 주체에서 발생하지 않고 횡단하는 감응. “마치 지각이 (도시를 포함하여) 자연의 비인간적인 풍경인 것처럼, 감응은 정확히 인간의 이런 비-인간되기이다. 따라서 모든 예술의 목표는 “대상의 지각작용에서 지각을, 그리고 지각하는 주체의 상태에서 지각을 얻어내는 것이고, 한 상태에서 다른 상태의 이행처럼 변용에서 감응을 얻어내는 것이다.
예술에 있어서 감각(의 이미지 즉 감각의 구성의 구도)의 구성적 평면을 창조하는 것은 감각과 힘을 연결시키는 것, 비가시적인 힘을 가시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또 비가청적인 힘을 가청화하는 것이다. 우리를 생성시키는 (생성시키는 것은 되기의 다른 말이다.) 지각불가능한 힘들을 지각가능하게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지각 자체의 정의이다.(영화 식스 센스) 우주-되기에서 우주의 힘들은 예술가에 영향을 미치고, 감응 혹은 되기를 유도한다. (사랑하는 사람은 연인이 보고 싶고 그래서 새가 되어 날아가고 싶고(되기), 인류애에 경도된 어떤 사람은 배고 푼 기아의 난민의 고통을 해결하고 싶어서 스스로 빵이 되어 먹거리가 되고 싶다.)
힘을 느끼는 것, 우주의 힘을 느끼는 것 자체가 바로 지각이고, 그 힘, 그 지각을 통해서 변용을겪는 것이 바로 감응(-되기)이다. 그 지각과 감응이 감각의 두 요소이다. 힘을 느끼고 힘을 받아들이는 감응은 감각 자체의 구성이 된다.
이런 감각의 분류는 회화에서는 데포르마시옹(변형)의 힘, 결합의 힘, 분리의 힘의 반복이다.
지각과 감응은 그 자체로 타당성을 가지고, 어떤 체험을 넘어서는 존재이다. 그리고 예술 작품은 다른 어떤 것도 아닌 감각의 존재이다. 존재는 그 자체가 복합믈 즉 구성이다. 구성은 현실로 들어나기 위해서는 구도 즉 평면(?) 즉 이미지(?)가 바탕이 되고 그것으로 드러난다.
이러한 복합물, 혹은 구성을 질료와의 관계로 설명하기 위해서 들뢰즈와 가타리는 현상학자 메를로 퐁티의 ‘살’에 대한 개념을 가져온다. 힘을 느끼고 드러내는 과정, 질료(물감, 소리, 단어 등)가 육질화되는 과정, 즉 감각은 “사건을 육질화한다”는 선언과 같이 질료가 살이 되는 것이 예술이다. 그러나 들뢰즈와 가타리는 현상학적인 살의 개념으로 예술을 다 설명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집-영토체계’의 개념을 착안한다.
집은 ‘단면들’, 벽, 마루, 천정, 지중에 의해 “다시말해 보강틀을 제공하는 다양하게 방향지어진 면들의 단면들”에 의해 정의 된다. 집들의 면들은 공간(위, 아래, 왼쪽, 오른쪽, 전경, 배경 등) 속에서 신체를 일정한 방향으로 향하게 하고, 또한 “집-영토체계”의 부분을 형성한다. 마루는 경계를 정하고 영토적 거주지를 만든다. 벽은 내부와 외부를 분리하고 지붕은 “장소의 특이성을 감싼다.” 패러다임적인 입방체-집의 각 면은 공간 덩어리를 잘라내는 프레임 혹은 영화의 프레임으로 역할을 하기 때문에 집은 세계를 ‘프레임’한다. 또한 집은 내부와 외부 사이의 소통을 허용하는 프레임들, 즉 창문들과 문들을 가지고 있고, 이런 의미에서 집들의 이행을 거주지 안팎으로 부여하는 필터이다. 그것은 거주자와 우주가 상호 작용하는 다공적이고 선택적인 막이다.
따라서 들뢰즈와 가타리는 “감각의 존재는 살이 아니라 우주의 비인간적인 힘들의 복합체이고, 인간의 비인간되기의 복합체이며, 그것들을 교환하고 조정하고 바람과 같이 주위를 소용돌이치게하는 다의적인 집이다. 살은 그것이 현상하는 것에서 사라지는 사진 현상액이고, 감각의 복합체이다”라고 결론 짓는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메를리 퐁티의 살의 개념이 예술 작품을 체험적 신체에 너무 밀접하게 연결시킨다고 생각한다 반면에 집의 개념은 미학적인 것의 비인간적인 차원을 강조한다.
<철학-내재성의 구도, 예술작품-구성의 구도>
들뢰즈의 예술은 개념의 창안으로서 철학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진다. 철학에서의 개념의 창안은 예술적 창조와 물리-생물학적 창조 사이에 다소간 신비스러운 친화성을 갖는다. 생성(-되기)이전에 자연의 일관성의 구도(평면)를 전제한다. (일종의 조건과 비슷한 것같다.) 그 일관성의 구도는 “일자가 단일하고 동일한 의미 속에서 차이나는 모든 것을 표현하는” 자연 전체의 단일한 구도이기 때문에 “내재성 혹은 단상성unicicity의 구도이다. 그것은 또한 각 신체가 ‘속도와 감응의 구성’이 되는 “구성의 구도”이고, 특개성, 디그리(정도), 강밀도, 사건, 우발적 사건”과 같은 자연적 유희를 통해 형성된다. 그것은 “추상적이지만 실재적이고 개체적이고 내재적인 추상 기계처럼” 잠재적인 구도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천의고원’에서 스피노자적인 일관성/내재성/구성의 구도를 두가지로 구별한다.
또한 되기의 특정한 종류인 철학의 내재성의 구도와 예술의 구성의 구도를 구별한다.
개념들의 창안은 ‘사건들의 지평선’, ‘절대적 지평선’인 내재성의 구도에서 발생한다. 내재성의 구도는 사유의 개념 혹은 생각 가능한 개념이 아니라 사유의 이미지이고, 사유를 가능케 하는 ‘전-철학적 조건’이다.
사유의 이미지는 ‘방법’이 아니라 “더욱 심오하고 언제나 전제된 어떤 것이며, 좌표의 체계, 다이나믹의 체계, 정향성의 체계”이다. 들뢰즈는 사유의 이미지의 예로서 이데아의 높이로 플라톤의 상승, 탁한 질료의 깊이 속으로 니체의 엠페스트클레스적 하강, 그리고 말과 신체의 표면을 따라가는 캐럴의 활주를 제시한다.
철학, 과학, 예술은 카오스를 직면하는 모든 수단이다. 철학과 과학과 예술은 카오스와 격렬히 싸우지만, 단지 독사doxa의 보호 방호물의 싸움에 카오스를 이용하기 위해서 이다.
독사 즉 일반 견해들은 신념적 편견이다. 그 독사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이 카오스에 즉면해서 개념과 감각과 기능을 창안하는 것이다.
<철학-잠재태, 예술-가능태, 과학-현재태>
철학은 ‘역-현실화’의 운동에서 현재태로부터 잠재태를 해방시킨다. 그것이 해방시키는 것은 카오스의 (본질적인) 잠재태는 아니지만, “잠재태는 일관적으로 되고, 한 부분의 카오스를 재단하는 내재성의 구도에 그 자체를 형성하는 실재물이 된다. 이것이 우리가 부르는 사건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철학의 내재성의 구조가 잠재적이고, 과학의 준거의 구도가 현재적이고, 미학적 예술의 구성의 구도는 가능적이다.
미학적 되기는 “어떤 것이 혹은 누군가가 끊임없이 다른 것이 되는 행위”인 반면, 개념적 되기는 “공통적인 사건 그 자체가 존재하는 것을 벗어나는 행위”이다. 예술의 되기는 “표현과 질료와 관계되는 타자성alterity이고, 철학되기는 “절대적 형식에서 포착되는 이질성이다.
철학의 ‘내재성의 구도’는 탈구체화된 되기의 구도이다. 예술품들은 “잠재적이지도 않고 현재적이지도 않은 우주를 창조한다. 그것은 가능적이고, 미학적 범주로서 가능태이며, 가능태의 존재이다.
반면 사건들은 잠재태의 실재성이고, 모든 가능한 우주를 상공 비행하는 자연-사유의 형식들이다.
(예술의 영역에서) 가능태는 기호의 영역이다. 들뢰즈적 용어의 의미로 기호로서의 얼굴은 구체화된 차이이고, 미지의 것을 감싸는 실재물이며, 해독되기 위해 펼침을 필요로 하는 실재물이다.
사실 들뢰즈의 음악과 회화에 대한 검토를 통해서 건축과 건축적 착상에 관한 방향을 내심 마음에 두고 추적해 가고 있다. 그러나 그 범위는 철학과 과학, 카오스와 우주, 잠재태과 가능태, 리토르렐로와 안면성, 내재성의 구도과 구성의 구도 등으로 끝없이 확장한다.
혼란스럽지만 그렇다고 소득이 없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리토르렐로라는 개념, 반복적인 탈영토화의 문제, 감각 그자체 그리고 구성의 문제, 원시적 머리에서 전제적 얼굴, 정념적 얼굴로, 얼굴에서 다시 탐사적 머리로 반복적인 탈영토화의 안면성문제, 힘의 발견과 감각의 구성적 배치, 카오스의 단면, 추상 기계와 사건의 개념…. 아직도 혼란스러움으로 혼돈으로 많은 것이 머리 속에 머물지만, 되기를 곤곤히 생각하면 모든 것이 지식이 아닌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제 그냥 감이 있다면 일단 구체적인 방향을 가지고 노력해야겠다는 마음이 든다. 펼쳐놓는 일, 그리고 곰곰히 생각하는 일이 중요하다.
로널드 보그는 천의 고원과 철학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감각의 논리, 의미의 논리를 넘나들면서 들뢰즈의 예술 특히 음악과 미술에 대하여 송곳같이 그러면서도 온 곳을 더듬고 다니면서 치열한 예술론을 구성한다. 이제 이책을 털고 다시 세상으로 나가야 겠다. 세상은 아직 일상에 그대로 머물러있을 것인가. 온난화로 더무 더워 고사했거나, 기상 이변으로 물속에 잠기지는 않았을까.
세상이 그립다. 일상이 반갑다. 그러나 중독처럼 또 다시 들뢰즈에 매일 것이다.
반복, 중독, 방황의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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