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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여행자의 시선

중명전, 치욕과 저항의 장소

치욕과 저항의 장소 중명전

경운궁(현 덕수궁)에서 시작하는 중명전의 역사
서울시청앞 대한문에서 왼쪽으로 그 유명한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 걷다 보면 넓게 열린 로터리가 있다. 친숙한 붉은 벽돌의 정동제일교회가 정면에 보인다 왼쪽에 나무가 많은 구릉지는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 분관의 진입공간이다. 공원같이 조경이 잘 꾸며져 있다. 덕수궁 담장을 따라 오른쪽으로 계속되는 언덕길은 상엄한 경계의 미대사관저 옆길이다. 사진기를 들었다가는 봉변을 당하기도 한다. 이 로터리에서 잘 조성된 돈의문 터로 넘어가는 이화여고와 예원학교의 사이길이 정동길이다. 정동길을 들어서면서 바로 오른쪽에 벽돌 외벽의 정동극장이 보인다. 극장의 오른편 끝 작은 골목이 있다. 건물의 사진과 함께 깨알 같은 글씨가 박힌 검은색 작은 안내판이 서있다. 이번 이야기의 중심 건물인 중명전(重眀殿)의 표지판이다. 이름의 가운데 명자는 날 일(日)자가 아닌 눈 목(目)을 쓴다. 덕수궁 권역에서 처음으로 지어진 양옥 건축물인 중명전은 대한제국의 혼란과 슬픔, 조선 역사의 혼돈과 좌절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중명전은 덕수궁 건립 당시 궐내 시설 중 하나로 건립되었다. 건물이 지어질 당시 처음의 이름은 수옥헌(漱玉軒)이다.
중명전 이야기는 덕수궁과 조선 마지막 왕이면서 대한제국을 선언하고 황제라 칭했던 고종으로 부터 시작해야한다. 덕수궁의 본래 이름은 경운궁이다. 경운궁의 시작은 정릉동 행궁으로 불리던 조선조 궁집, 명례궁이었다. 명례방(明禮坊)은 조선시대 행정 구역상 한성부 남서(南署)에 속해 있었다. 명례궁이 있었던 자리는 원래 1469년(예종 1년) 남이(南怡)장군의 역모사건에 연루되었던 조영달(趙穎達)의 집 터였다. 집을 몰수하여 1470년(성종 1년) 세종의 막내 왕자였던 영응대군의 부인 송씨(宋氏)에게 하사하였다. 1년 뒤 송씨가 이 집을 다시 왕실에 바치자 연경궁으로 이름 짓고 왕실의 별궁이 되었다. 1472년(성종 3년)에는 요절한 세조의 장자, 의경세자의 영정을 모시는 의묘를 연경궁 후원에 세우기로 하였다. 제사를 맡은 월산대군은 이곳을 하사 받았고, 이후 왕자의 저택이면서 의묘가 있는 제사궁이 되었다. 1593년(선조 26) 10월 임진왜란으로 한양 내 모든 궁궐이 소실되자 이곳 행궁을 궁궐로 사용하였다. 정릉동 행궁으로 불리던 이곳은 1611년(광해군 3) 10월에 경운궁이라는 궁호를 받게 되면서 정식 궁궐로 승격되었다. 인조반정 이후에는 대부분의 건물과 토지를 원래 소유자에게 돌려주어 더 이상 행궁으로도 역할 하지 않았다. 
하나 더 정릉동에 대하여, 정릉은 이조를 창건한 태조가 둘째 부인 신덕왕후 강씨를 위해 조성한 묘다. 태조와 태종 이방원과 함께 조선 건국을 도모했던 신덕왕후 강씨의 묘인 정릉은 한성 5부 중 서부에 속했던 취현방(현 영국대사관 근처)에 자리했었다. 태조가 죽고 난 후, 왕위 계승을 둘러 싼 정쟁에서 신덕왕후와 틀어졌었던 태종 이방원은 왕릉 중 정릉만이 도성 안에 있고, 너무 크고 넓다 하여 현재의 성북구 아리랑로(사을한산, 현 정릉)로 이장했다. 민간의 무덤과 다름없었던 정릉은 260여 년이 지난 1669년(현종 10)에 왕릉의 격을 갖추게 되었다. 묘는 이장되었지만 지금은 정동이라 불리는 덕수궁 주변이 조선조에 정릉동이라 불렸던 이유이다. 자료를 찾다보니 알게 된 혼란스런 사실, 신덕왕후의 정릉은 한성 서부의 취현방에 있었고 행궁(경운궁)은 한성 남부 명례방에 있었는데 정릉동 행궁으로 불린 것이다. 명례방에 있는 그 정릉동 행궁, 약 274년 동안 잊혀졌던 경운궁이 아관파천 후 고종의 명으로 다시 대한제국의 황궁이 된다. 즉조당과 석어당 두 채의 건물만 남아있던 좁은 별궁인 경운궁에 고종이 애착을 보인 것은 자신이 피신했던 러시아공사관과 미국공사관, 영국공사관 등에 둘러싸여 어떤 나라, 특히 일본의 무력도발이 쉽지않다는 이유이다. 고종은 우선 침전인 함녕전과 서재인 보문각, 역대 임금의 어진을 모신 사성당과 선원전 등 필요한 건물을 짓고 대한제국을 선포한 1897년 경운궁으로 환궁했다. 정전으로 1902년 중화전이 완공될 때가지 5년간 즉조당을 활용했다. 그런데 기거한지 2년만인 1904년, 함녕전 온돌 교체공사 도중에 발생한 화재로 궁궐이 거의 전소되었다. 황궁을 창덕궁으로 옮기는 것을 검토했으나 지정학적으로 안전한 황실 도서관 건물로 사용하던 수옥헌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후 1910년(순종 4년)) 석조전이 완공될 때까지 줄곧 수옥헌(1906년 이후 중명전으로 개칭)이 고종의 침전 겸 편전(집무실)로 사용되었다. 수옥헌에서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은 1905년 11월 17일에 있었던 을사능약의 체결이다. 당시 대사자격으로 한국에 온 이토 히로부미는 고종과 대한제국 정부 대신의 반대로 한일협약안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경운궁과 수옥헌 주변에 군대를 주둔시켜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고 찬성하는 대신 만 따로 모아 조약을 체결하였다. 결국 한규설, 민영기, 이하영은 반대했지만 11월18일 새벽 1시 이완용, 이지용, 이근택, 권중현, 박제순 등 이른바 ‘을사오적’이 조약 체결에 동의했다. 일본인의 고문을 명시한 굴욕적인 1904년 제1차한일 후,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일본에 넘기는 제2차 한일협약이었다. 을사능약, 제2차 한일 협약의 체결로 통감부가 설치되고 초대 통감으로 이토 히로부미가 취임하였다. 이 강압된 조약은 대한제국을 일본의 보호국으로 삼고, 식민지화하려는 일본 제국의 흉계가 숨겨져 있었다. 이 이후에 한일신협약과 기유각서 등을 이완용의 내각과 일본의 한국통감부 사이에서 체결하여, 한국의 국권을 점차 침탈해갔다. 1910년에는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되어 대한제국은 멸망한다. 고종의 마지막 저항이라 할 수 있는 1907년 헤이그에서 소집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이준, 이상설, 이위종을 밀사로 파견하였다. 고종이 헤이그의 밀사들을 만난 곳이 중명전이다. 헤이그 주재 일본 공사가 일본 외무성에 보낸 긴급 전문을 입수한, 위기에 몰렸던 이토 히로부미는 총리대신 이완용을 압박하여 순종에게 양위를 강제하고, 결국 결국 7월 19일 오전 양위식이 거행되었다. 양위식은 고종 황제와 순종 황제가 직접 하지 않고 두 명의 내관들이 대신하였다. 순종은 창덕궁으로 이어하고 태상황이 기거하는 경운궁은 ‘상황의 궁’의 의미로 ‘덕수궁’으로 불리게 되었다. 


경운궁 최초의 서양식 건축물 중명전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한 1897년에 러시아공사관에서 경운궁으로 환궁하고 전각들을 새로 지으면서 대한제국의 도서관으로 수옥헌이 지어졌다. 1899년 선교사 아펜젤러가 촬영한 사진에 의하면 수옥헌은 덕수궁에 있는 정광헌과 유사한 모습의 1층 양옥이다. 당시 건물의 설계는 군사교관으로 초빙되었던 미국인 육군소장 출신 윌리엄 맥킨타이어 다이(William McEntyre Dye)의 아들이자 한성부 건축기사로 초빙된 제이 에이치 다이(J.H. Dye)가 설계했다고 알려져 있다. 1901년 화재가 있었고 이후 지금의 2층 양옥 건축물로 지어졌다. 여러 자료에서 보면 2층 양옥의 수옥헌의 설계자를 러시아 건축가 사바찐으로 소개하고 있다. 다음은 사바찐에 관한 송기석의 글을 부분 인용한 것이다.
‘1900년을 전후한 시기에 경운궁에 지어졌던 서양식 건축물을 설계한 건축가는 당시 대한제국에 체류하고 있었던 러시아인 건축가 사바찐(Afanasij Ivanobich Scredin Sabatin)으로 알려져 있다. 1860년경 러시아에서 출생한 것으로 알려진 사바찐은 1883년 서울에 왔다. 사바찐은 이때부터 러일전쟁으로 러시아인들이 대한제국에서 철수할 때까지 약 20년 이상의 기간 동안 우리나라에 머물렀다. 사바찐의 건축 활동으로 알려진 것은 1885년에 준공된 러시아 공사관이 처음이었다. 사바찐이 설계한 이 건물은 당시 제정 러시아의 고전주의 양식으로 지어진 벽돌조 단층 건물로 3층 높이의 탑과 함께 정면과 측면에 설치된 아케이드가 두드러진 특징이었다. 사바찐은 1895년(고종 32년) 음력 8월 20일(양력 10월 8일) 명성황후가 시해된 을미사변(乙未事變)을 직접 목격하게 된다. 그리고 바로 이듬해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기게 되었다. 고종이 러시아와 밀접한 관계를 갖게 되면서 사바찐은 경운궁에 지어지게 되는 많은 양관 건축에 직접적으로 관여하게 된다. 많은 왕실 건축물 신축에 참여하였을 뿐만 아니라 1897년에 지어진 독립문, 1903년에 지어진 손탁호텔 등에도 참여하였다.’ (궁궐에 들어선 근대건축물(2) :경운궁 / 송기석 홈페이지 참조)
순종에게 양위하고 퇴위한 고종은 1910년 나라가 일제에 강점된 상태에서 덕수궁 석조전으로 기거를 옮겼다. 고종이 떠난 후 1915년 일제는 덕수궁 영역을 축소하고 중명전은 궐 담장 밖에 위치하게 되었다. (첨부 그림 덕수궁배치도 참조) 외국인을 위한 사교클럽인 정동구락부(Seoul Union)에 임대 되었고 1960년 경까지 계속 되었다. 당시 국내인으로 이 구락부에 가입한 회원은 민영환, ·윤치호, 이상재, 서재필, 이완용 등이었다. 외국인으로는 미국공사 실(Sill,J.M.B.,施逸)과 프랑스영사 플랑시(Plancy,C.de.)를 비롯해 당시 한국 정부의 고문으로 초빙된 다이(W.M.Dye,)와 리젠드르(Legendre,C.W.), 미국인 선교사 언더우드(Underwood,H.G.)와 아펜젤러(Appenzeller,H.G.) 등이 있었다. 1925년 화재가 발생하여 2층 전체를 태우는 큰 피해를 입었다. 복원은 되었지만 원형이 크게 상실되었다. 해방 이후 국유화되었고 1963년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에게 소유권을 이전되었다. 1976년 이후 민간 기업으로 소유권이 넘어간 후 관리 소흘과 개조 등으로 원형을 짐작 할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되었었다. 2006년 문화재청이 관리하면서 2007년 덕수궁에 추가되어 사적으로 편입되었다.  2009년 전면적인 복원으로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목조 트러스의 서양식 벽돌 건축물
역사적인 건물에서 원형을 밝히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유럽에서 르네상스 시대부터 건설 장인의 직접적인 현장 제작 작업에서 드로잉이라는 설계가 분리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드로잉이 작업지시와 설계적인 가치를 가지고 자료 체계를 가지게 된 것은 18세기 건축전문교육이 정착하고나서 일이다. 드로잉은 (건축적인) 아이디어, 작업 지시를 위한 제작용 도면, 역사적 가치를 가지는 정신 표현의 과정이다. 목적과 수단과 자료의 의미를 가진다. 많은 역사적인 건축물은 설계한 건축가의 이름과 제작과정 혹은 결과 보고서로서 드로잉이 남아있지 않다. 조선조에 지어진 국왕에 의한 국책 사업들은 ‘의궤’라는 사후 작업 보고서에 기록을 남기고 있지만 혼란기에 지어진 조선 말기의 국가 공역은 거의 제대로 남아있지 않다. 지금은 덕수궁으로 불리지만 대한제국의 황궁으로 지어지고 건축물의 하나인 수옥헌 후에 중명전으로 이름이 바뀌는 이 건축물의 건축가, 설계 자료도 물론 전무하다. 선교사의 아펜젤러 등 그 당시 선교사의 몇장의  사진과 일본이 그린 덕수궁 배치도를 통해서 상상하고 추정할 뿐이다. 우리가 구할 수 있는 구체적인 자료는 2009년 전면적인 보수공사를 진행하면서 남긴 문화재청의 ‘덕수궁 중명전 보수복원보고서’가 거의 유일하다. 보고서의 내용은 객관적이고 충실하지만 건립 기원에 관한 내용은 어쩔 수 없기에 복원 결과에 대한 논란이 있다.  
중명전 기초는 화강석 줄기초 4단(일부 3단)을 쌓고, 상부로 벽돌 조적 벽체를 구축했다.              
바닥은 목재 세로 단면의 장선을 촘촘히 깔고 장선의 휨과 좌굴을 짧은 사선 부재로 보강했다. 보수 복원을 위해 해체시에는 여러 차례 소유자와 기능이 바뀌면서 철골보가 보강되고 콘크리트가 타설된 상태였다. 벽체는 221~230 X 110 X 55mm의 벽돌로 덕수궁의 정광헌과 같은 규격이다. 벽돌벽체 쌓기는 네델란드식 2매쌓기 방식으로 되어 있다. 지붕은 목조트러스 구조이다. 평보와 대공, ‘ㅅ’자 보로 구성된 왈대공 트러스를 기본구조로 하였으며, 트러스를 건물의 중앙부 좌우에 2개소 설치 후, 대각선 방향으로 반 왕대공을 설치하여 전체적으로 보면 모임지붕을 형성한다. 트러스는 종방향 트러스 2개소, 귀트러스 6개소, 그 외 17개의 트러스로 구성되어 있다. 외벽간의 폭은 약 16.2m, 21.8m 정도가 되는데 16.2m를 질러가는 트러스의 평보는 왕대공 하부에서 엇걸이산지이음했다. 21.8m의 긴 것은 3개의 부재를 이음했다. 중명전의 난방방식은 벽난로가 사용되었다. 보수복원 이전의 건물은 북서측 일부만 테라스가 있고, 정면과 측벽엔 외부 벽체에 바로 창문이 있었다. 발굴된 사진자료와 해체시 확인한 원형에 따라 1, 2층 모두 정면과 양측면이 회랑으로 복원되었다. 깊은 처마와 베란다의 건축물로 살아났다. 건물의 정면 중심에 조금 넓은 아치가 위치하고 양편에 3개씩의 아치가 베란다 외부에 조적 구조벽 기둥 사이에 있다. 1층과 2층의 입면이 동일하고 1층 중심부는 포치 모양으로 돌츨되어 입구를 강조하고 있다. 
자료를 다시 공부하면서 자료도면을 드로잉으로 정리하는 동안 건물이 섬세하게 디자인되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혹자는 중명전 건물을 르네상스식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양식으로 분류하는 연구는 학자들의 몫일 것이다. 양식적인 지식이 아니어도 아름다움은 느낌으로 온다. 단아한 비례와 사이클로로이드 곡선에 가까운 부드러운 아치. 요소와 재료들의 아름다움 조합, 안벽과 외부 기둥이 만드는 이중벽의 입체감. 햇빛이 좋은 날에는 그림자 덕에 더욱 입체감이 돋보인다. 치욕의 역사와 재기를 위한 눈물 겨운 몸부림을 간직한 중명전이 이렇게 남아 있는 것이 감사하다. 많은 역사적인 건물은 다시 오리지널 논란과 복원의 시도가 다시 반복될 것이다. 그래도 우리 곁에 남겨서 사랑해야 한다. 중명전을 다시 공부하는 시간이 행복했다.     
  

중명전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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