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 세번째 이야기 ; 전투의 상처와 소망의 섬
강화도에는 해발 400m가 넘는 몇 개의 산들이 있다. 마니산, 혈구산, 진강산, 별립산. 섬 남부에 제일 높은 마니산은 단군 왕검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마련했다는 참성단이 있다. 마니산 우측에 해발 225m의 정족산에는 단군의 세아들이 쌓았다는 삼랑성이 있고 일대가 정족산성이다. 대원군의 천주교 탄압에 대한 보복으로 1866년 프랑스 함대가 침입했다. 병인 박해는 프랑스 주교, 전교사, 신자 여럿이 살해된 사건이다. 당시 프랑스는 혁명이 마무리되면서 제2제정에 나폴레옹3세가 황제로 있었다. 중국의 눈치를 보면서 신중한 대응을 원했던 프랑스 황제의 지침을 넘어 로스 제독은 강화도에 침입해서 만행을 저질렀다. 오만하고 방심한 프랑스 군이 정족산성에 주둔하려 할 때 조선군 양헌수가 덕진진을 거처 정족산성으로 진격하는 맹렬한 공격으로 프랑스군을 물리쳤다.
후에 1871년 신미양요 때는 로저스 장군이 이끄는 미국 극동함대와 치열한 포격전을 펼쳤으나 초지진으로 상륙한 미국 해병대에 의해 끝내 점령당하는 비운을 맞이했던 곳이다. 미군에 의해 파괴된 성루와 성곽을 1977년 복원했다. 안타깝게도 복원된 성루의 지붕은 그 당시 방식의 콘크리트 구조라 한다. 강화 초지진은 해상으로부터 침입하는 적을 막기 위하여 구축한 요새로, 조선왕조실록이나 승정원일기에서 초지진 설치에 대한 기사에 따르면 조선 효종 6년(1655)에 설치된 것으로 보인다. 신미양요를 배경으로 얼마전 티브이 연속극으로 방영되었던 잘 만들어진 드라마가 미스터선샤인이라는 드라마가 있었다. 군사적인 강국에 둘러싸인 지정학적으로 복잡한 우리나라는 지금도 병인년과 신미년에 겪었던 복잡한 입장에 서있다. 더군다나 그들 열강에 의해서 80년에 가깝게 남북이 분단된 상황이고 남북은 혹독한 전쟁을 겪었다. 통일과 강국으로 가는 길이 무엇일까?
전등사는 고구려 소수림왕 11년(381) 아도화상이 세웠다고 전하지만 고려 중기까지의 역사는 확실히 알 수 없다. 조선 선조 38년(1605)과 광해군 6년(1614)에 큰 불이 일어나 절이 모두 타버려, 그 이듬해 다시 짓기 시작하여 광해군 13년(1621)에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고 한다. 창건 당시에는 진종사(眞宗寺)라고 했으나 1282년(충렬왕 8) 충렬왕의 비인 정화공주가 승려 인기(印奇)를 중국 송나라에 보내 대장경을 가져오게 하고, 이 대장경과 함께 옥등(玉燈)을 이 절에 헌납한 후로 전등사라 고쳐 불렀다고 한다. 전등사는 오래된 절인만큼 많은 전설이 있다. 안타까운 로맨스 하나. 광해군 때 이 법당을 지었던 도편수(都片手)에게는 사랑하는 여인이 있었으나 그가 불사에만 전념하는 사이 다른 남자와 눈이 맞아 도망을 가버리자 도편수는 식음을 전폐하고 일을 하지 않다가 마음을 고쳐먹고 법당을 다시 짓기 시작했다. 기둥 위에 여인의 나체상을 조각하여 수치심을 느끼게 하고, 또 머리 위에는 무거운 지붕을 얹어 고통을 줌으로써 자신을 배반한 여인에게 복수했다는 내용이다. 건물은 고주를 세우지 않고 평주 위에 대들보가 걸쳤다. 기둥은 배흘림이 있다. 공포는 외이출목(外二出目)·내사출목(內四出目)으로 다포계 양식이다. 앙서[仰舌]와 수서[垂舌]로 장식된 살미첨차는 끝부분 곡선으로 강하게 뻗어 있다.
전등사는 정족산의 산지를 효과적으로 이용해서 풍경과 어울리는 아름다운 배치를 이루고 있다. 특히 가을에 단풍과 어우러진 경관이 기억에 남는다. 그 때는 신도들이 만든 국화 축제를 하고 있었다. 계단마다, 기단마다 소박하지만 강렬한 색들의 국화가 단풍과 함께 한 전등사, 강화도. 개천의 전설과 나라의 수난, 저항과 함께 소박한 삶들의 소망의 장소로 기억된다.
2019 12 11 이 관 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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