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들뢰즈가타리의 철학이란 무엇인가

이관직 2011. 10. 3. 18:50

들뢰즈가타리의 철학이란 무엇인가를 다시 읽었다. 아젠다동아리에서 세미나

덕분이지만 읽을수록 달라지고 새로워지는 글들의 변주는 정말 감탄과 찬사를 참기 어렵다.

 

 

 

철학이란 무엇인가 요약발췌

결론 / 카오스에서 두뇌로

 

카오스에 대응하기 위한 견해 doxa

우리는 카오스로부터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 사유 혹은 관념을 노력하지만, 고통스럽게도 관념들은 윤곽이 떠오르기가 무섭게 사라지고 소멸되어버린다. 우리들은 끊임없이 우리들의 관념을 상실해 간다. 그렇기 때문에 고정된 견해들에 대하여 매달린다.

카오스에 대적해서 우리의 관념들은 유사, 인접, 인지 등의 방어적 규칙 등을 동원하여 광기, 착란을 막아줌으로써 관념 들 속에 다소간의 질서를 부여하는 것이다. 카오스로부터 우리를 보호해주는 작은 양산처럼, 하나의 견해를 형성하기 위해 우리가 요구하는 것은 사물과 사물의 상태 내와 관념들 속에 약간의 질서, 그리고 사물과 사유의 교점으로서 감각(적인 기준)의 재생이다. 이 모든 것으로부터 견해가 형성된다.

 

예술, 과학, 철학

종교는 우리들 견해의 시원인 원적견해Urdoxa의 형상들 처럼 신들의 왕전이나 유일신의 현현에 구원을 요청하지만 예술, 과학, 철학은 초월적 체계에 의지하는 원적견해 혹은 종교와는 달리, 천상을 찢어내고 희생을 감수하고 차라리 카오스에 침잠하여 죽음의 길을 택한다. 그러나 세 학문은 그 죽음의 희생을 통하여 저승을 통과하게 된다. 그들은 사자의 세계에서 돌아온 자들이다.

철학자는 카오스로부터 내재성의 분할구도를 설정하는 절대 평면들 위에서, 혹은 절대 부피들 내에서 서로 분리 불가능해진 변주들variations을 가져온다.

과학자는 카오스로부터 감속에 의해(대해) 독립되어진 변수들variables을 가져온다. 간섭의 소지가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다른 가변성을 모두 제거함으로써 그 결과 채택된 변수들은 하나의 기능 내에서 규정 가능한 관계들은 맺게 되는 것이다,(지시작용)

얘술가는 카오스로부터 다양성들vatietes를 갖고 온다. 그것은 기관 내에서 감각의 재생을 구축하는 것이 아니라 무한을 되돌릴 수 있는 비유기체적 구성의 구도 상에서 지각의 존재, 감각의 존재를 세운다.

세잔느와 클레처럼 화가는 참변이나 격정을 겪어 내며 카오스를 가로지르는 분할을 통하여 카오스로부터 구성의 구도로 자신을 이글어 가는 도약의 궤적을 캔버스에 남긴다.

 

견해에 대한 투쟁

카오스와의 싸움은 적과의 결탁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 같다. 왜냐하면 또 다른 싸움, 즉 카오스 자체로부터 우리를 보호해준다고 자처했던 견해와의 투쟁이 전개되어 중요성을 더해 간다.(지금의) 예술가는 카오스와 투쟁하기보다는(오히려 카오스에 간곡히 구원을 청하고 있는지 모른다) 관습과 견해의 판에 박힌 생각들에 대항해서 격투를 벌이고 있다. 예술이 카오스에 대항하여 싸우는 것은 그로부터 무기를 차용하여 그 무기들은 견해들을 향해 겨누기 위해서이다.

예술은 카오스와 투쟁한다. 하지만 그것은 그러한 투쟁에서 일순간에 카오스를 밝혀내는 비전, 하나의 감각을 발현시키기 위함이다.

예술은 조이스의 말대로 카오스적 우주론chasmos, 즉 구성된 카오스를 ? 예견되었거나 사전에 구성된 것이 아닌 ? 구축한다. 예술은 카오스의 가변성을 재편된 카오스의 다양성으로 변형시킨다. ( 295/엘그레코, 터너, 스타엘, 바토)

 

예술이 카오스의 한 조각에서 다양성으로 재편된 카오스적 감각을 끌어내는 것이라면 과학은 카오스를 좌표계안에 고정시켜, 지시관계가 부여된 카오스를 형성함으로써, 그로부터 우연적 기능과 재편된 카오스적 변수들을 끌어낸다. 예술과 과학에서 카오스와의 투쟁이란 단지 견해를 겨냥한 좀더 심원한 투쟁의 도구일 뿐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불행은 바로 견해로부터 비롯되기 때문이다. 과학은 이제 그에게서 통일성 내지는 통합화에 대한 종교적 취향을 빌려주는 견해와 적대적 관계로 돌아서고, 과학 자체 내애서도 결정론적 예측(라플라스의 신)과 확률적 추정값(맥스웰의 악마)으로 이루어진 우르독사로서의 과학 고유의 견해와 등을 돌리게 된다. 이제 과학은 소통을 극소변이들의 기이한 결과들에 의해 정의되는 창조성의 조건들로 대체시킨다.

 

그 학문들에 있어서 견해에 대항하는 사유의 투쟁과 견해 자체 속에 함몰되었을 때의 사유의 퇴화를 동시에 이해하고 극복하기 하기 위해서 예술의 감각적 다양성과 과학의 (재편된 카오스적) 기능적 변수만으로는 부족하다. 이제 철학이 분화되지 않은 심연 혹은 상이함의 대양으로서 카오스와의 투쟁을 벌일 차례이다.

개념은 견해와 같은 연상작용이 아니고, 합리화된 우르독사를 구축할 수 있는 이성의 질서나 이성들이 아니다. 관념들은 단지 이미지들로서만 연결가능하며, 추상으로서만 질서화가 이루어진다. 개념에 이르기 위해서는 이 둘 모두를 초극해야 한다.

하나의 개념은 분리불가능한 변주들의 딥합으로, 이 집합은 카오스의 가변성을 재단하여 그것에 일관성(현실)을 부여하는 내재성의 구도상에서 산출되거나 구축된다.

 

두뇌

사유한다는 것은 끊임없이 카오스와 대결하는 것이다.

카오스는 그것을 재단하는 구도들에 따라서 세 딸을 갖는다. 이것이 카오스를 재단하는 구도들 상에서 산출된 현실들로서, 사유 혹은 창조의 형식들로서 카오이드(chaoide), 즉 예술, 과학, 철학이다.

이러한 세 구도의 접합(단일성이 아닌)이 바로 두뇌이다. 뇌는 수평적 결합과 서로 반응하는 수직적 통합적용의 복합적 총체이다. 뇌는 통합의 작용이기 때문에 게슈탈트적이지만, 결정된 목표나 만들어져 있는 프로그램이 아니라 (스스로 설정하는) 구도의 전제에 따라 사전 조립 없이 작동하기에 게슈탈트이론으로는 설명 불가능하다. 견해들은 환경, 이해관계, 믿음과 장애들 근거하기 때문에 게슈탈트를 따르는 비누거품들처럼 증식해대는 형태들이다.

사유란 유기체적 결합들과 통합작용들에 의해 형성되는 두뇌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사유하는 것이지, 두뇌가 사유하는 것이 아니다 라는 명제를 쫓으며 현상학은 기계론과 역동론의 이중의 비판을 거치지만 견해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단지 원초견해 즉 우르독사에 이르게 할 수 있을 뿐이다.

전환점은 두뇌가 바로 주체가 되는 것이다. 사유하는 것이 바로 두뇌이지 인간이 아니다. 인간은 단지 두뇌의 결정체일 뿐이다. 철학, 예술, 과학은 객체화된 두뇌의 정신적 대상들이 아니라, 두뇌가 카오스와 대적하기 위해 타고 가는 세 개의 뗏목들, 세 개의 구도들이다.

두뇌의 특성은 자체-조감(auto-survol)이며, 진정한 형태이고, 자체적 형태이고, 절대형태이다.

 

두뇌는 정신 그 자체이다. 개념은 창조된 것으로서의 대상, 사건 내지는 창조 자체가 되며, 또한 철학은 개념들을 지탱하며 두뇌가 설정하는 내재성의 구도가 된다. 그리하여 두뇌의 운동들은 개념적 인물을 배태한다.

개념 못지 않게 감각 역시 두뇌이다. 자극-반응이라는 신경 결합과 지각작용-행위라는 뇌의 통합작용 둘 다 두뇌이다. 감각은 자극체의 진동들을 신경면 위에 혹은 뇌의 용량 속에 집약시킨다.

집약이란 행위가 아니라 순수 감각, 뒤 따라오는 것 속에 앞의 것을 보존하는 관조이다.

감각은 기계론, 역동론, 궁극론과는 다른 구도상에 있다. 그것은 구성의 구도이다.

감각은 순수 관조이다. 관조를 통해서 집약이 이루어지며 감각 자신의 시원이 되는 요소들을 관조함에 따라 스스로를 관조하기 때문이다. 감각은 향유 enjoyment이며 ‘자체-향유self-enjoyment이다. 그것은 주체이며, 투입injet이다. 그것은 또한 투출ejet로 표상된다.

식물이나 대지 바위가지도 관조로 정의할 수 있다. 모든 것들이 감각을 통해 관조하는 질료의 요소이다.

이는 마치 꽃들이, 신경계와 뇌를 갖춘 어떤 동체가 그것을 지각하고 향기를 맡아보기 이전에, 시각이나 후각의 최초의 시도들로서 꽃들 자신을 구성하는 것을 냄새 맡고 느낌으로써 스스로를 느끼며 향기를 발하게 되는 것과 같다.

바위나 초목들에게는 신경체계는 없지만 집단적 두뇌로서 표상되는 감각이 가능할지 모른다.

화학적 유사괸계와 물리적 인과관계들은 그 자체가 요소들을 집약시켜 그것들을 반향하게 함으로써 자신들을 보존할 수 있는 근원적인 힘들에서 비롯된다. 사물의 비유기체적 삶을 구축하는 힘들은 어디에나 존재한다.(스피노자?)

 

인식-기능

인식이란 형태도 힘도 아닌 하나의 기능이다. 주체는 이제 투출로 표상된다. 그것은 변별, 구별을 그 주된 특징으로 하는 요소들을 추출해내기 때문이다. 즉 한계들, 항수와 변수들, 함수들, 바로 이러한 기능소들이나 전망들이 과학적 명제를 형성하는 것이다. 그러나 과학적 인식을 이루는 이러한 실행들이 곧 두뇌의 기능들이라고 말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못하다. 기능들은 그 자체가 인식(지시작용)의 구도의 좌표화된 변수들을 설정하여, 도처에 부분적 관찰자들을 파견하는 두뇌의 주름들이다.

 

변수들(결합들) 사이의 관계들은 단지 통계학적 카오스를 증명하는 전기적 신경 연접에서 뿐만 아니라, 결정론적 카오스를 가로지르는 화학적 신경 연접에 있어서도 불확실하고 우연적인 어떤 특성을 나타낸다.

두뇌 속에서 서로 결합되는 구도들 간의 간섭 작용이 중요하다. (외재적 간섭, 내재적 간섭, 위치시킬 수 없는 간섭)

간섭의 첫번째 유형은 철학자가 감각 내지 기능에 대한 개념을 창조하고자 시도할 때 나타난다. 두번째는 수학자나 과학자가 감각의 기능들을, 또는 개념의 기능을 창조할 때이다. 세번째는 예술가가 개념 내지는 기능들의 순수감각들을 창조해 낼 때이다.

과학마저도 비과학과 관련을 맺음으로써 그 효과들을 반영시킨다. 예술은 예술가들이 아닌 우리들을 양성하며 각성시키고 느끼는 법을 가르쳐주어야 하고 또 철학은 우리에게 이해하는 법을, 과학은 인식하는 법을 가르쳐주어야 할 뿐 아니라 각 학문이 그 자신을 위해 그 와 관련된 부정non과 근본적인 관계를 맺을 때만 진정한 교육학이 가능할 것이다.

 

구도들 간의 간섭작용

세 구도들은 그들의 요소들과 더불어 환언불가능하다. 즉 철학에서의 내재성의 구도, 예술에서의 구성의 구도, 과학에서의 지시관계 혹은 좌표화의 구도 : 개념의 형태, 간각의 힘, 인식의 기능: 개념들과 개념적 인물들, 감각과 미학적 형상들, 기능들과 부분적 관찰자들이 그러하다. 그렇지만 각 경우에 있어 구도들은 하나이거나 다수이다. 이제 중요한 것은 두되속에서 소로 결합되는 구도들의 간섭작용의 문제이다.

철학자가 감각 내지 기능에 대한 개념을 창조(리만의 공간, 무리수의 고유개념…), 훼치너처럼 과학자가 감각의 기능들을 창조, 추상예술이나 클레처럼 예술가가 개념들 내지 기능들의 순수감각을 창조해 내는 것의 문제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간섭하는 학문은 그 자신의 고유한 방법들에 의해서 간섭을 행해야 한다.(312)

 

두뇌적 민중, 카오스-민중

(부정을 통하여 세 학문은 보다 높은 어떤 곳을 지향한다.) 두뇌와 카오스의 관계에서 ‘다가올 민중’의 그림자가 빠져 나온다. 그것은 예술 뿐만 아니라 철학과 과학이 부르는 그대로, 대중적-민중, 세계적-민중, 두뇌적-민중, 카오스-민중이다. 그것은 클레의 비개념적 개념이나 칸딘스키의 내적 침묵처럼, 세 개의 학문 속에 누워있는 비-사유적 사유이다. 바로 거기에서 개념들, 감각들, 기능들은 결정할 수 없는 상태가 되고, 그와 동시에 철학, 예술, 과학은 구별 불가능한 것이 된다.

 

2010-8-20 이 관 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