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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료-형식틀'과 미학의 본질 장승규 ---인용글

이관직 2009. 7. 23. 08:03

'질료-형식틀'과 미학의 본질 예술작품의 근원

 

 

▶ 예술작품을 질료와 형식으로 구분하는 것은 미학의 영역에서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설명 도식이지만 그 적절성과 관련해서는 '미학'이라는 명칭만큼이나 자주 논란거리가 되고 있다. 논란은 질료와 형식을 나누는 방식으로는 아름다움과 예술의 진정한 본질을 제대로 포착할 수 없다는 근본적인 회의에서 비롯된다. 아름다움이란 본질적으로 질료에 근거하는가, 아니면 형식이나 질료와 형식의 상호작용에 근거하는가? 구체적인 예술작품에서 어떤 것이 질료이고 어떤 것이 형식인지를 실제로 구분할 수 있는가? 우리는 암묵적으로 질료를 비이성적인 것, 형식을 이성적인 것으로 상정하고 질료보다는 형식을 중심 항으로 삼는데 이것은 이성 중심주의의 표현은 아닌가?(UK 12) 이러한 의문들은 질료와 형식이라는 자명해 보이는 구분이 사실은 매우 의심스러운 것임을 보여준다.

▶ 하이데거에 따르면 '질료-형식틀'(Stoff-Form Gefuge)19)은 대부분의 미학이론에서 발견되는 기본 도식이며, 이와 관련해 제기되는 지속적인 회의는 그 개념틀의 본질유래를 밝힘으로써 해명될 수 있다. 질료(Stoff)-형식(Form)이라는 표현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휠레(?λη)-모르페(μορ??), 그리고 이것의 라틴어 번역어인 마테리아(materia)-포르마(forma)에서 비롯되었다. 질료-형식틀의 최초 형태인 휠레-모르페 개념쌍 속에는 플라톤에 의해 세워진 존재자의 존재를 형상(ε?δο?)과 이데아(?δ?α)로 보는 특정한 존재자관(觀)이 내포되어있다.

▶ 플라톤의 새로운 존재자관은 존재자의 존재를 퓌시스(??σι?)로 보던 초기 그리스인들의 근본 경험으로부터의 이탈을 의미한다. 하이데거는 이러한 이탈과 함께 그 후 서양 역사의 전 기간 동안 유지되는 존재 해석의 방향이 결정되었다고 주장한다. 퓌시스란 "본래대로 자라나고, 어떤 것에 압박 받지 않고 솟아오르며 생겨난 것, 그 스스로 돌아오고 지나가는 것"(NI 95)을 뜻한다. 이것은 그리스인들이 존재자를 自然, 즉 스스로 그러한 것으로 보았다는 것을 말한다. 이에 반해 형상과 이데아는 감각기관으로서의 시각을 비롯해 "알아차릴 수 있는"(vernehmbar) 모든 것에 대해 "보여진 것", "어떤 사물이 보여주고자 하는 모습"20)을 뜻한다. 하나의 존재자는 이러한 보임새(Aussehen)에 의해 바로 그러한 존재자로서 존재하게 되므로 보임새가 그 사물의 원형(Urbild)이자 실체(ο?σ?α), 즉 본질로 간주된다. 이처럼 미학에서 통용되는 질료-형식틀은 퓌시스에서 이데아로의 전환이라는 존재해석상의 근본 사건을 반영하고 있다.

▶ 이러한 전환에서 중요한 것은 플라톤이 퓌시스를 이데아로 특징지었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앞으로의 존재 해석에서 특정한 해석만이 유일한 것으로 남게 된다는 사실이다. 존재를 이데아로 보는 것 자체가 존재망각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러한 해석도 퓌시스라는 근본 경험의 결과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데아로의 존재 해석은 이데아, 즉 본질(Wassein, 무엇임)만이 '있음'이며 그 밖의 것은 순수한 보임새의 실현을 방해하는 '있지 말아야 할 것', 또는 '정말로는 있지 않은 것'이라는 주장으로 확대된다. 이와 함께 원형과 모방(Nachbild), 복사(Abbild)라는 분열과 위계 질서의 발생이 뒤따른다21).

▶ 하이데거는 플라톤 존재 해석의 핵심 동인을 '제작' 모형에서 찾는다. 제작은 무엇인가를 머리 속에 그려보는 데서 시작된다. 이렇게 미리 그려진 표본은 제작될 존재자가 어떻게 만들어져야 하는지를 앞서 규정한다. 제작이란 바로 그러한 형상을 질료 속에서 구현하는 과정에 불과하다. 제작 활동으로 방향 잡혀 존재자를 형식화된 질료로 보는 이러한 설명 방식은 만물을 신의 피조물로 보는 성서적 관점에 의해 확산되고, 종교의 지배가 사라진 후에도 강력한 영향을 미치게된다. 질료-형식틀은 비이성적인 것과 이성적인 것이라는 구분이 결부되면서 주체-객체 연관이라는 강력한 개념 장치로 작용하게 된다(UK 12 참조).

▶ 하이데거는 『예술작품의 근원』에서 고호의 그림 「농부의 신발」을 분석하면서 특정한 존재 해석에 근거하는 질료-형식틀이 존재자의 본질 해명에 적합하지 못하다는 것을 보여준다(UK 18이하). 신발이라는 존재자는 발에 신기 위한 목적으로 제작된 사물로 고유한 '용도성'(Dienlichkeit)이 재료의 선택, 형태의 구성등 그 사물 자체를 속속들이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이러한 신발이 지닌 특정한 용도성과 퓌시스에 귀속하는 '신뢰성'(Verlaßlichkeit)을 구분한다. 신발의 용도성은 본질적으로 신뢰성의 토대 위에서만 가능하다. 『존재와 시간』의 논의 맥락을 따른다면 앞서 개방된 '사용사태전체성'(Bewandtnisganzheit) 속에서만 도구는 자신의 개별적인 용도성을 지닐 수 있다22). 그러나 질료-형상틀은 신발 자신이 발원하는 그러한 신뢰성은 사상(捨象)한 채 "적나라한 용도성"만을 보여준다. 따라서 하이데거는 하나의 존재자가 참으로 무엇인지는 "보임새, 이데아를 보는 것을 통해서는 결코 경험되지 않으며 하물며 사태에 적합하게 사유되지도 않는다"23)고 주장한다24).